공산품 구매자는 ‘고객’이지만 미술품을 구입하는 컬렉터는 후원자인 동시에 작가의 동반자다. 이중섭의 ‘황소’를 35억6,000만원에 경매 낙찰받고 종로구 석파정 자리에 서울미술관을 개관한 국내 대표 컬렉터 안병광(59) 유니온약품 회장의 소장품전과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을 후원하며 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과시하는 젊은 컬렉터 톰 탄디오(Tom Tandio·36)의 컬렉션전이 나란히 막을 올렸다. 미술품을 투자목적으로만 본다면 외국작품의 수익률이 월등히 높지만 이들은 고국의 작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왜, 어떻게 미술품을 수집하는지를 보여준다.
◇서울미술관 ‘A컬렉션’= 옛 선비들은 자신이 소장한 작품 혹은 자신이 감상하고 감동한 작품에는 이름을 적고 낙관을 찍었을 정도였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작품 구입을 숨기고 소장내역을 밝히기 꺼리는 이상한 풍토 속에 살게 됐다. 그럼에도 소장품들을 자신있게 내보인 서울미술관의 ‘A 컬렉션’은 A급 작품이라는 것과 안 회장의 영문 첫 글자를 중의적으로 뜻한다.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5만 원권 지폐 도안으로 친숙하고 개관 4년 만에 처음 공개된 신사임당의 ‘초충도’ 7점이다. 미술관 설립 전부터 초충도를 수집해 온 안 회장은 같은 주제로 총 18점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김환기의 1969년작 ‘26-Ⅱ-69 #41’은 지난 2014년 말 케이옥션 경매에 추정가 7억~14억원에 나와 7억원에 낙찰된 작품이다. 한국의 자연을 단순화해 표현하던 김환기의 추상적 경향이 푸른색 점화로 변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수작이다. 금추 이남호의 ‘도석화’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던 안 회장이 당시 월급과 맞먹는 20만원에 구입한 첫 소장품이다. 요절한 천재화가 이인성의 ‘남산병원 수술실’에는 “아들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이 그림을 아들 방에 걸어 두고 응원했다”는 소장자의 꿈이 담겨있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던 임직순의 ‘소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풍경’,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작품 1989년작 ‘TV는 새 심장이다(TV is New Heart)’를 비롯해 박서보·이우환·서세옥·김창열·오치균 등 근현대미술의 주요 작품들이 총망라됐다. 한 소장가의 애착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게 대견해 보이는 전시다. 12월 25일까지. (02)395-0100
◇인도네시아 톰 탄디오 컬렉션=인도네시아의 현대미술은 독재정권이 끝난 1998년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자동차 관련 사업가인 톰 탄디오는 인니 현대미술과 함께 성장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동시대 미술을 후원하는 비영리기관 ‘인도아트 나우(IndoArt Now)’의 설립자이며 ‘젊은 컬렉터 이사회’의 회장이다. 아시아 지역의 대규모 미술장터인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Art Stage Singapore)’의 협력 디렉터를 맡은 것도 세계 무대에 인도네시아 작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을 내건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의 컬렉션전은 9명 작가의 작품 27점을 통해 인도네시아 미술의 오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탄디오가 처음 작품을 구입하게 만든 에코 누그로호는 만화를 기반으로 한 특유의 화풍을 갖고 있다. 인물의 머리 부분을 텔레비전 등의 물건으로 대체한 그림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취향이나 사회적 지위로 대체된다는 것을 꼬집는다. ‘견디다’는 뜻의 브랜드명을 가진 과자봉지를 그림 한구석에 그려넣은 것은 참아야 버틸 수 있는 현실을 비틀어 보여준다. 에코 누그로호에 대해 탄디오는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모순을 희극적으로 풀어 보는 이에게 ‘각성의 웃음’을 준다”면서 “자신만을 위한 작품을 하는 게 아니라 이웃과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컬렉션을 시작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사진그룹인 ‘MES 56’의 멤버 위모 암발라 바양은 쓰러진 코끼리를 통해 족자르타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진흙으로 빚은 도자를 5시간에 걸쳐 깨나가는 알베르트 요나단 스티아안의 영상과 설치작품은 불교의 영향부터 현실문제 타파의 의지를 두루 암시한다. 젊은 수집가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값도 유명세도 아니다. 작가와의 인간적 교류를 중시해 교감을 기반으로 수집방향을 정했기에 컬렉터는 그림뿐 아니라 역사까지 함께 써가는 중이다. 전시는 12월10일까지. (02)3448-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