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95초 사과'가 남긴 것들

송영규 논설위원

개인이 국가기밀 보고받고

인사에 개입하는 기막힌 현실

국민이 나서는 비극 막으려면

대통령이 결자해지 해야

송영규 위원송영규 위원




95초. 약간 떨리는 목소리와 붉게 물든 눈이 함께했다. 476자를 모두 읽고 난 후 박근혜 대통령이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 연설문 유출 파문이 일어난 지 24시간이 채 안 돼서다. 아마도 박 대통령에게는 생애 그 어느 때보다 길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불과 하루 전 국회에서 ‘개헌’이라는 비장의 승부수를 던질 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태일 터다.


국민들의 분노가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최순실 때문일까. 형식도 내용도 과거와 사뭇 달랐다. 직접 기자들 앞에 서서 대국민 사과문을 읽었다. 박 대통령 취임 이래 이런 형식의 사과는 처음이다. 지난 2013년 인사참사 때 허태열 청와대 비서 실장, 지난해 성완종 리스트 파문 때 김성우 홍보수석의 ‘대독 사과’와는 비교가 안 된다. 2013년 기초연금 축소에 따른 공약 파기 논란과 2014년 세월호 참사 때조차 국민 앞이 아니라 국무위원들을 앉혀놓고 사과문을 읽었던 대통령이다. 그 자존심 강한 대통령이 자신의 목소리로 국무위원이 아닌 국민을 향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고 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정도면 됐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대통령의 사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동안 감춰졌던 또 다른 사실들이 다시 홍수처럼 쏟아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독대할 때 나왔던 남북 군 접촉 기밀이 최씨 손으로 넘어갔고 정부 각료들이 e메일로 인사 청탁을 했다는 내용도 추가됐다. 이 정도면 국정농단, 국기문란이 아니라 최씨가 국정 그 자체였다고 봐야 한다. 이 나라에 박근혜 대통령 말고 또 한 명의 대통령이 있었나 보다.


온라인에는 ‘이게 무슨 사과냐’ ‘대한민국 국민인 게 부끄럽다’ ‘나라가 무너졌다’는 한탄이 가득했다. 대통령은 사과문을 읽을 때 눈시울을 붉혔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에 옷을 벗어야 했던 공무원, 학점을 받기 위해 밤샘을 했던 여대생들은 TV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던져진 그 수많은 질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답을 주지 않고 휭하니 들어가 버렸다. TV에 ‘속보, 대통령 대국민 사과’라는 큰 자막을 읽고 끝까지 자리를 버텼던 국민들은 허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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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방송 직후 온라인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사과’도 ‘최순실’도 아니었다. ‘대통령 탄핵’과 ‘탄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야’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대학가에서는 한동안 사라졌던 시국선언이 다시 나타났다. 국민들이 현 정권의 존재 의미에 대해 기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는 듣지 않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갇혀 산 결과다. ‘봉건시대에도 볼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을 잉태한 주범은 바로 ‘불통의 리더십’이었다.

그럼에도 알고 싶은 게 있다. 이 참극을 초래한 박 대통령과 최씨의 연결 고리는 무엇이었나. ‘친구’나 ‘말벗’의 한계를 넘게 한 그것이 무엇이기에 최씨가 국민이 선거를 통해 권한을 위임한 대통령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넘어서는 권력을 갖게 됐는지. 어떻게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청와대 행정관들이 최씨를 ‘모셨는’지, 왜 그의 이름 석 자에 모두가 설설 기는지 모든 게 궁금하다.

또 묻고 싶다. 장막 뒤의 대통령이 국정을 주무르고 있는 동안 청와대 비서진과 여당, 소위 ‘멘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할 말은 하겠다”던 여당 대표는 어디 가고 “나도 연설문 같은 것을 쓸 때 친구에게 물어보곤 한다”고 말하는 호위무사만 가득한가. 국민을 바라보지 않고 대통령만 바라봤던 결과가 지금의 참극을 불렀다는 비판에 도대체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이제 대한민국에 대통령은 없다. 청와대의 대통령도, 장막 속의 대통령도 모두 사라졌다. 국민은 절망와 분노에 빠졌고 정부 여당은 경험하지 못한 혼란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자해지라 했다. 사고를 쳤으면 당연히 책임도 져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이든 청와대든 여당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국민이 나서는 순간 그것은 비극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skong@sedaily.com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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