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불통과 강경, 미신 정치의 최후





1917년 2월 말 러시아. 정국이 혼란과 위기 국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파업에 기관총을 난사한 이후 소요는 들불처럼 번졌다. 병사들은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 둘 봉기에 뛰어들었다. 짜르(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독일군과 싸우러 전선에 머물던 상황. 내각은 강경 진압파와 온건 대화파로 나뉘었다. 실세 내무장관 알렉산더 포르토포포프가 강경대응책을 내놓았다. 두마(Duma·의회) 해산과 반정부 성향 의원 체포, 그리고 무차별 발포.


두마와 손잡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던 골리친 수상은 이를 물리쳤다. 수상은 강경책 대신 온건파가 제안한 ‘내각 총사퇴와 두마 3일간 정회, 대중의 신망이 높은 미하일 알렉세이브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신 내각 구성’ 방안으로 기울었다. 각료들도 수상을 거들었다. 무조건 강경책만을 부르짖고 평소에도 권력을 휘두르던 포르토포포프 내무장관에 대한 반감도 컸다. 정작 골리친 내각은 시간을 놓쳤다. 소요 진압에 투입된 군 병력이 오히려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준 상황. 결국 각의는 강경책을 골랐다.

강경책의 약발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두마 해산령이 발동(2월27일)된 바로 다음날, 수도권 주둔 부대 병사의 대부분이 혁명에 가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군중들은 궁정과 의사당으로 몰려갔다. 김학준 교수(전 동아일보 회장)의 ‘러시아 혁명사(1979)’에 따르면 포르토포포프 내무장관은 ‘이제 남은 것은 나를 총살하는 것 뿐이오. 내각이 총사퇴합시다’는 발언을 마치고 각의를 떠났다. 이게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각료회의였다. 얼마 뒤 의사당과 궁전에 무기를 든 민중이 몰려왔다. 러시아 2월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만약 실세 장관이던 포르토포포프가 다르게 대응했다면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은 존속할 수 있었을까. 단정하기 어렵지만 연명 시간이 길어질 수는 있었을 것 같다. 파업 시위가 시작될 때 노동자들은 ‘간신들에 둘러싸인 짜르가 제정신을 차리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기대했던 성은이 내리기는커녕 쏟아진 기관총탄은 모든 것을 삼켰다. 시위대의 분노가 커지고 병사들은 회의감에 빠졌다. 병영으로 돌아와 토론을 시작한 병사들은 부대 단위로 혁명에 뛰어들었다. 애초부터 발포 대신 대화를 택했다면 제정 붕괴는 지연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포르토포포프 내무장관이 그런 단안을 내릴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 귀족이자 대지주, 부유한 섬유업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금융업과 제철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정치에도 뛰어들었다. 신문사도 세웠다. 온건 개혁에서 중도좌파로 변하는 10월당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1916년 짜르 니콜라스 2세에 의해 내무장관으로 발탁됐다. 직전 직함인 두마 부의장 자리 역시 황제에게 받았지만 실력보다는 연줄로 승승장구했다. 제정 러시아를 말아먹었던 ‘라스푸틴’과 알렉산드라 황후가 그의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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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당 동료 의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황후와 괴승 라스푸틴의 눈에 들었던 그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김학준 교수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전시의 공안을 담당할 내무장관 자리에 라스푸틴의 천거로 멍텅구리에 가까운 포르토포포프가 올랐다’고 썼다. 의학사학자인 프리드릭 카크라이터 등의 공저 ‘질병의 역사(번역 김훈)’에서는 더욱 혹독한 평가가 나온다. ‘사실 그는 두마의 부의장 자리에도 전혀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알렉산드라가 황제에게 거듭거듭 부탁한 끝에 임시 장관을 거쳐 겨우 내무장관직에 올랐다.’

프로토포포트는 말기 매독의 두뇌 이상 증상을 보였다. 내무부 장관으로서 업무보다는 공상적인 계획을 짜고 복잡한 도표와 차트를 작성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각료회의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두마도 교묘하다 할 만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우리로 치면 국회 출석을 피한 것이다. 라스푸틴이 암살 당한 1916년 말부터는 행동이 더욱 이상해졌다. 강신제(降神祭·내림굿)를 통해 불러들인 ‘라스푸틴 혼령의 힘’을 빌려 황후에게 조언하고, 황후가 조카들의 병구완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혼자서 국정 운영을 도맡았다.

당시 짜르의 인사 자체가 엉망이었다. 황태자의 혈우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베리아 출신의 괴승 라스푸틴이 인사를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짜르의 숙부이자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장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니콜라스 대공도 라스푸틴의 전횡을 견제하려다 해임됐다. 숙부 대신 스스로 총사령관직을 맡은 짜르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 러시아군은 연전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유능한 장관으로 이름 높던 플리바노프 전쟁장관도 라스푸틴과 황후의 입방아로 쫓겨났다. 프로토포포트의 정신 이상을 의심한 황제가 내무장관을 경질하려면 황후가 매달려 막았다. 인사가 이런 식이었다.

러시아 권력 최상층부가 엉망진창인 가운데 경제난 심화로 일반인들의 삶은 더욱 찌들어갔다. 물가는 1차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에 비해 평균 3.2배가 올랐다. 육류는 4.3배, 소금은 6.8배로 뛰었다. 급여와 소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절망과 썩을 대로 썩은 러시아 사회 구조, 황실의 라스푸틴에 대한 집착이 로마노프 왕가의 명줄을 304년 만에 끊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프로토포포트도 2월 혁명 직후 자신이 키운 비밀경찰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자주 정신착란에 빠지다 1918년10월27일 처형 당했다. 나이 51세였다.

프로토포포트는 전반기와 후반기 삶이 완전히 달랐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사업을 확장하고 정당에 몸담아 개혁을 추진하던 30세 초반까지의 삶과 그 이후가 극명하게 갈린다. 동료들의 개혁 의지를 배반한 채 의회 부의장과 장관직을 차지했던 그는 의회의 부름에는 빠지고 국민에게는 철권을 휘둘렀다. 소통보다는 오직 한 사람만 쳐다보고 무당에게 의존했던 정치인의 최후는 비참하게 끝났다. 황후는 프로토포포트를 ‘진실한 사람’이라고 믿었다지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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