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위정현의 이글 아이 콘텐츠] 콘텐츠 창작자여, 야성을 회복하라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미국 음악가 밥 딜런이 최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116년 만에 최초로 소설가와 시인을 제치고 수상자로 선정됐다. 음악가가 수상하니 논란도 뜨겁다. 뉴욕타임즈는 ‘왜 딜런은 노벨상을 받으면 안되는가’라는 컬럼에서 ‘그는 위대한 음악가이기에 위대하지만, 음악가에게 노벨상을 줄 때 작가에게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딜런은 무덤덤한 것 같다. 수상 다음날 공연에서 청중들이 ‘노벨상 수상자’라고 연호하며 열렬한 박수와 함성을 보냈지만 딜런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도 학창시절 즐겨 들었던 그의 노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는 이런 가사로 채워진다.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영원히 포탄 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네’

딜런은 1960년대 베트남 반전 운동의 기수였다. 1960년부터 1975년까지 16년의 베트남전 기간 동안 미군은 전사자 5만 7939명, 부상자 75만 2000명이라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냈다. 더구나 베트남전은 부도덕한 전쟁으로 전세계인의 지탄을 받은 전쟁이었다. 이런 미국의 부도덕함에 정면으로 저항한 운동이 1960년대의 반전운동이고, 딜런은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예술가이기에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감지했고, 그의 감수성은 전쟁을 반대하는 노래로 이어진 것이다.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무려 4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영혼과 음악성을 자각한 셈이다.


사회적 저항이라는 공통점은 이번에도 아쉽게 문학상을 놓친 후보 1위,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하루키는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 1, 2위를 다투지만 아직 수상의 행운은 그를 맞이하고 있지 않다. 하루키는 1960년대 일본학생운동 조직이었던 ‘전공투’ 열풍 속에서 청춘을 보낸 인물이다. 그는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렇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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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 스트라이크에 총력을 결집하라’ 선동하는 학생의 연설은 훌륭했고 내용에 이견은 없었지만 문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들의 진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루키도 일본 사회의 대립과 국가 권력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 속에 고뇌하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창작에 대한 강렬한 에너지가 되었다.

한국의 명작, 온라인게임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이다. 그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80년대 대학 시절 비록 학생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했다. 한글 워드프로세서 개발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김택진 사장이 개발 현장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의무감과 사명감 때문이 아닐까.

불후의 콘텐츠는 야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지금 한국 창작자들은 너무도 온순하다. 굶주린 늑대가 아니라 배부른 강아지 같다. 그들은 자기 검열과 국가 권력의 검열이라는 이중의 사슬에 묶여 있다. 영등위는 영화를 감시하고 게임물관리위원회는 게임을 감시한다. 창작자들은 이런 환경에 길들여져 있다. 게임 개발자들의 머리 속에는 전체이용가, 12세, 15세 이용가의 기준표가 들어 있다. 영화도 세계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감성만 자극하는 사극 영화나 만들어 돈을 번다. 이러니 40년 후에도 한국이 노벨상을 받을 리 만무하다.

딜런이나 하루키가 40년 후의 노벨상을 기대하고 저항한 것은 아니다. 그냥 예술적 본능, 가장 인간의 아픔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그들의 본능에 충실한 것 뿐이다. 지금 우리의 창작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본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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