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7일, 금융통화위원회가 50억환 규모의 통화안정증권 발행을 의결했다. ‘한국은행 통화안정증권법’ 제정 일주일 만에 선보인 통화채 발행목적은 크게 세 가지. 통화량 조절과 4·19혁명, 5·16쿠데타의 혼란 속에 사라진 퇴장 자금 유치, 시중은행들의 방어적인 대출 운용에 따른 불용 자금(여유 자금) 누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던 군사정부는 세 번째 이유에 기대를 걸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발행된 통화안정증권은 은행들의 외면을 받았다. 할인율 8%라는 금리조건 탓이다. 시장금리가 20~30%대에서 형성되던 시절 한 자리 수의 낮은 금리를 제시하는 통에 34억환 어치만 팔렸을 뿐이다. 첫 발행에 실패한 이후부터는 아예 발행이 끊겼다.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1962~1966) 중 은행들의 대출 급증으로 노는 자금이 사라져 은행의 중장기 자금 과부족을 조정하는 유통증권으로서 통안채가 필요 없었다.
한국에서 통안채 발행이 최초로 추진됐던 시기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말. 외화 표시 통화안정증권 발행이 시도됐었다. 미군을 비롯한 UN(국제연합)군으로부터 들어오는 외화자금이 국내 통화로 바뀌면서 통화가 급증하고 물가가 뛰자 그 대응책으로 제시됐다. 당시 외화자금은 100달러 단위까지 직접 관장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으나 이 방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재선을 노린 이 대통령의 위헌적 직선제 개헌, 즉 부산 정치파동의 여파로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안채 도입과 발행이 늦어졌던 데에는 생소한 제도라는 비판도 한 몫 거들었다. 선진국에서 채택하는 나라가 없었다. 1961년 도입 당시에도 중앙은행이 공개시장에서 증권을 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고 있는 12개국은 대부분 신생국가였다. 그나마 실행하는 곳은 아르헨티나와 실론, 두 나라였을 뿐 나머지는 법만 마련한 상태였다.
국내에서 통안채가 통화조절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966년부터.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타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돈이 많아지자 한은은 통화 팽창과 물가 불안, 원화 가치 상승을 막기 위해 통화채 발행을 시작했다. 그래도 발행 물량은 많지 않았다. 통안채가 급증세를 타기 시작한 시기는 5공 이후. 1970년대 말까지 300억원 이내였던 발행잔액이 1981년 1,000억원선을 넘은 데 이어 1986년 1조원, 1988년 10조원 규모로 불어났다. 1980년대 3조 호황을 타고 건국 이래 처음인 무역수지 흑자 누적에 따라 통안채 발행도 급증세를 탔다.
통안채 발행 규모 급증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상환하거나 이자를 갚기 위해 새로운 통안채를 발행하는 구조로 접어든 것.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통안채는 더욱 불어났다. 외환위기(IMF 사태)를 맞은 직후인 1999년 50조원, 2003년 100조원, 2005년에는 150조원 선을 넘었다. 지난해 10월 말 현재 통안채 발행잔액은 20억원 모자란 178조원. 정점을 찍었던 2015년 7월 말의 189조원보다는 줄어든 상태다. 통안채 발행 잔액이 다소나마 줄어든 것은 통화안정계정이나 한국은행과 제1금융권 간 6개월 이하 단기 예금 거래가 통안채 발행을 대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중 금리가 낮아진 통에 이자 부담이 줄어든 상태라지만 막대한 규모의 통안채는 국민경제에 부담이다. 무엇보다 한국과 비슷한 규모의 통안채를 안고 있는 나라가 없다. 대부분의 국가는 일본처럼 국가가 직접 국채를 발행하고 외환을 관리하고 있다. 통안채를 여느 국가들처럼 국채로 전환할 경우, 한국의 국채 규모는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통안채의 존재는 국민의 착시현상을 유발하는 대규모 분식 회계인 셈이다.
더욱 고약한 대목은 양극화의 원인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은이 주로 무역수지 흑자에서 발생하는 달러를 사들여, 원화로 바뀌어 시중에 풀리는 통화 증발을 막는 인플레이션 회피 과정에서 대기업 편중 지원 효과가 부수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통안채가 처음 발행된 1961년 150원이던 미 달러화에 대한 공식 환율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시절(1979)에는 450원, 외환위기(1997) 직전에는 770원 수준이었으나 요즘은 1,140원대를 오르내린다. 경제가 성장하는 데도 통화가치가 갈수록 하락하는 국가는 전 세계를 통틀어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점은 국민경제가 누려야 할 성장의 과실이 특정 부문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 아닐 수 없다.
환율 구조가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점은 한 가지 의문을 낳게 만든다. 갈수록 심화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현상의 무수한 원인 가운데 통안채도 한 몫 거들고 있지 않을까. 물론 더 많은 수출과 외환 확보를 위한 선투자로써 통안채가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주로 수출 대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통안채의 발행잔액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반면 내수중소기업에 주로 지원되는 중앙은행의 총액대출한도는 십수년째 10조원 한도에서 묶여 있다. 일반 국민의 눈에는 잘 안 보여서 그런 것일까. 정책 대안 마련이 필요한 사안이건만 정부와 중앙은행이 여기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논설위원 겸 선임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