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해운·철강·석유화학 등 만성적 공급과잉으로 벌어진 ‘치킨게임’에서 생존 싸움을 벌였던 국내 기업들이 다시 한번 벼랑 끝 승부를 마주하고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 지원으로 공격적 전략에 나섰던 일본과 중국 업체들이 업황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최근 들어 다시 사업 철수 등에 들어간 반면 우리 기업들은 구조조정 끝에 흑자로 반전하면서 역공을 펼 기회를 맞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제2의 치킨게임’이 벌어질 조짐이다. 여기서 이긴다면 일본과 중국 등을 제치고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흐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최순실 게이트’ 등으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크지만 산업 정책만큼은 100년 대계의 큰 틀 속에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과 현대중공업 등 우리 조선사들이 구조조정으로 3·4분기 흑자를 낸 반면 우리를 맹추격하던 일본 업체들은 대규모 손실에 빠진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 4위인 나무라조선소가 올 상반기(4~9월) 78억엔(약 850억원)의 손실을 기록해 1년 만에 적자 전환했으며 가와사키중공업도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20분의1로 줄고 당기순이익은 2억엔 이상 손실을 보였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이 조선사업 축소계획을 밝힌 데 이어 가와사키도 조선·해양 부문의 철수 가능성을 내비쳤다.
일본 조선사들은 지난해 이후 우리 업체들이 수주절벽에 빠진 사이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수주 잔량에서 우리를 추월하기도 했다. 한 조선사 임원은 “일본 업체들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은 우리 기업들이 다시 도약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대와 삼성중공업은 3·4분기 각각 3,218억원과 840억원의 흑자전환에 성공했으며 최근 수주도 서서히 늘고 있다.
해운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현대상선이 채무조정을 통한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업계에서는 그동안 회의론이 득세했다. 내년 다시 유동성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관측에 이어 세계 최대 업체인 머스크에 인수될 것이라는 전망마저 제기됐다.
하지만 글로벌 해운시장 불황 속에서 머스크의 실적하락 소식이 들려와 우리 기업은 반색하고 있다. 이날 나온 머스크의 3·4분기 실적을 보면 이 회사의 해운사업 부문인 머스크라인(2M)은 치킨게임에 따른 운임하락의 영향으로 매출이 전년동기보다 11%나 줄었고 순손실도 1억2,200만달러에 달했다. 상대방을 고사시키는 치킨게임을 지속했지만 제 살 깎아 먹기 끝에 자신들까지 손실의 늪에 빠져든 것이다. 업계에서는 2M이 한국 업체들의 구조조정으로 초과이익을 향유해왔지만 반대편인 오션얼라이언스를 결성한 선사들도 대규모 신조 선박을 발주하면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기업평가의 한 관계자는 “양대 얼라이언스 간 2차 치킨게임이 시작되는 것 같다”고 관측했다.
전문가들은 해운시장의 기류 변화가 우리 기업에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현대상선의 경우 머스크 등의 실적 하락세가 뚜렷한 상황에서 글로벌 영업망을 조기에 복원할 수만 있다면 세계 시장에서 다시 한번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우리 업체들이 도전적 입장에서 제2의 치킨게임에 나설 공간이 열린 셈이다. 실제로 현대상선은 한진해운 미주·아시아 노선 자산과 함께 로스앤젤레스(LA) 롱비치터미널 지분을 패키지로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두 노선은 머스크 등이 호시탐탐 노려온 먹잇감이다. 하지만 현대상선이 정부와 채권단의 전폭적 지원 아래 인수에 성공할 수 있다면 해운 치킨게임에서 승자는 아니더라도 승부의 파트너가 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철강 업종도 마찬가지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지난해 서울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중국의 철강 공급과잉 문제를 설명하며 “시진핑(중국 국가주석)도 풀 수 없는 문제”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은 우리 업체들이 구조조정의 틀을 제대로 짜기도 전에 공격적 구조조정을 진행해 우리 업체들의 위협 대상이 됐다. 세계 철강 생산량 11위의 우한강철과 5위 바오산 합병, 세계 2위의 허베이강철과 9위 서우강강철 간 합병 추진 등 우리를 위협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한편으로 중국 국영 철강기업 바오산철강그룹의 자회사이자 광둥성 최대 제강사인 ST샤오강이 올 9월까지 9,560만위안의 누적적자를 내면서 한계업체 퇴출이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에 대해 철강 업종에서도 다시 치킨게임이 벌어지는 신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대형업체들의 합병을 유도하기는 했지만 그 밖의 업체들은 시황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퇴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6개월에서 최대 1년 정도만 우리 업체들이 흑자 흐름과 공격적 투자에 나설 수 있다면 치킨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중국 업체들이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는 사이 우리 업체들은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포스코의 3·4분기 실적을 보면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1조343억원에 달해 4년 만에 분기 영업이익 1조원을 넘어섰다. 전년동기보다 59%나 늘어났다. 2년여 동안의 치열한 구조조정을 딛고 대규모 흑자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익 중 이른바 프리미엄 제품의 매출이 크게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코는 이 기간 영업이익률이 월드프리미엄(WP) 제품과 솔루션마케팅 판매량 확대, 철강 가격 상승, 원가절감 등에 힘입어 전분기보다 2.1%포인트 오른 14.0%로 나타났는데 이는 2011년 3·4분기 이후 최고 수준이다. 특히 평균 이익률이 15~20%인 WP 제품 비중을 48%까지 끌어올렸다.
다시 시작되는 치킨게임에서 또 하나의 긍정적 신호는 구조조정 업종에서도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곳들의 시황이 조금씩 개선되는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 국내 조선 대형업체들이 장점을 지닌 컨테이너선 시장이 내년부터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전문지인 트레이드윈즈에 따르면 독일 선사인 ‘헤르만불프’사가 2006년 건조된 4,546TEU급 컨테이너선 ‘빅토리아불프’호를 해체 시장에 넘긴 데 이어 그리스 해운사 ‘박스십스’사도 선령이 10년밖에 안 된 4,546TEU급 컨테이너선 ‘박스퀸’호를 해체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선령이 10년밖에 되지 않는 ‘젊은’ 선박들이 해체되는 것은 35년 만에 처음인 이례적일 일로 우리 조선업체들로서는 조금만 더 견디면 만성적 수주절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어볼 만하다. 클락슨은 최근 보고서에서 내년 컨테이너선 발주량이 224척으로 올해(134척)보다 1.7배 늘어나 여러 선종 가운데 발주량 회복이 가장 빠를 것으로 전망했다.
업계에서는 기업들의 자구 노력이 어느 정도 빛을 보고 우리와 경쟁 관계인 외국 기업들이 다시 부진에 허덕이는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대대적인 지원책을 펼 호기라고 강조했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기계전자산업팀장은 “조선 사업의 비중을 줄여온 일본 중공업 업체들에서 최근 시황 악화에 따른 철수 얘기가 나오는 것은 우리나라 조선업계에 긍정적 시그널”이라고 말했고 전준수 서강대 석좌교수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황에서 현대상선이 글로벌 국적선사로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롱비치터미널 등 핵심 자산 인수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금전적 인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우회적 지원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