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트렌트호 나포 사건…대통령의 품격



1861년 11월8일 여명, 카리브해. 미합중국(북부)의 1,567t짜리 기범선 산 하신토호가 영국 우편함 트렌트호(1,856t)를 가로막았다. 공해상 자유항행권과 대영제국의 위신을 믿은 트렌트호가 검문을 거부하자 산 하신토호의 선장 윌크스는 경고 사격을 날렸다. 트렌트호는 결국 멈춰 섰다. 배를 샅샅이 뒤진 북부 해군은 몇 사람을 끄집어냈다. 남부동맹이 영국과 프랑스에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파견하려던 외교사절 일행이었다.

거물급 포로를 잡은 함장 찰스 윌크스는 트렌트호를 돌려보내고 의기양양하게 보스턴항으로 돌아왔다. 북군이 연전연패하던 시기,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윌크스 선장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젊은 시절부터 공격적 기질과 탐험가로 유명했던 그는 63세 나이에도 자원 입대, 대어를 잡았다. 남부 동맹이 유럽에 보내려던 밀사 두 명은 거물급 인사로 유서 깊은 가문 태생이었다. 제임스 메이슨은 독립전쟁 당시 헌법제정회의 의장이던 조지 메이슨의 손자이자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다. 변호사 출신인 존 슬라이덴 역시 연방 하원과 상원의원직을 거쳐 북부에도 친구가 많았다.


연방 정부는 화려한 경력의 남부 인사들을 ‘반란 세력’이라며 군 감옥에 보냈다. 시민들이 환호하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처음에는 반색했으나 얼마 안 지나 낭패감에 빠졌다. 영국의 거센 항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영국은 겉으로는 남북전쟁에 중립을 표명하면서도 내심 남부를 지원하던 상황. 특히 북부의 해상 봉쇄로 타격을 입은 무역업자와 미국 남부산 면을 원료로 삼아온 방직업자들은 ‘건방진 북부를 손보자’고 목청을 높였다.

영국은 차츰 북부의 목줄을 조였다. 화약의 원료인 초석 등 전쟁물자 수출도 금지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 파머스턴 내각은 남부동맹 외교사절 석방과 사과를 요구하며 불응할 경우 ‘전쟁 불사’ 의사까지 밝혔다. 캐나다에 대규모 전쟁물자를 비축하는 계획도 세웠다. 야당인 토리당 계열의 신문들은 연일 미국과 전쟁을 외쳤다. ‘한 나절이면 미합중국 해군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영국의 태도는 갈수록 완강해졌다.

영국 외교관들은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휘날리던 군함이 보호하던 승객을 체포한 행위는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며 링컨 행정부를 몰아 부쳤다. 런던에 망명해 당시 세계 최대 부수였던 미국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의 런던 특파원으로 일하던 칼 마르크스는 ‘영국이 전쟁의 구실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바로 이 시기에 미국은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기사를 썼다.(정명진 엮음, ‘런던 특파원 칼 마르크스’에서 발췌)

다급해진 링컨이 소집한 국무회의는 그해 크리스마스 오전에 소집돼 마라톤 회의를 시작했다. 다른 장관들이 ‘전쟁 불사’를 외치는 가운데 국무장관 슈어드가 판세를 갈랐다. 슈어드는 ‘윌크스 함장의 트렌트 수색은 정당한 권리지만 죄수 체포 권한은 미 합중국 해상 포획물 심판소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남부 사절을 석방하자는 슈어드 제안에 대한 국무위원들의 지지가 늘어날 때, 링컨 대통령이 슈어드를 가로 막았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겸 정치 평론가인 도리스 컨스 굿윈의 저서 ‘권력의 조건’에는 당시 장면이 소개된다. 회의가 결론을 못 내고 끝나는 순간 링컨 대통령은 슈어드 국무장관에게 업무를 맡겼다. ‘죄수를 석방해야 만 하는 이유를 보다 정확하게 제시해 주세요. 나는 석방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요컨데 대통령과 장관들의 토론으로 정책 대응 수위와 방법, 시기를 정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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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26장 짜리 보고서를 준비한 슈워드는 이튿날 속개된 국무회의에서 ‘남부 사절 석방’ 안건의 만장일치 가결을 이끌어냈다. 회의를 마친 뒤에 슈어드가 링컨에게 물었다. ‘반대 토론을 준비하신 걸로 알았는데 왜 찬성하셨습니까?’ 링컨의 대답은 슈어드에게 감동을 안겼다. ‘국무장관께서 제출한 근거가 다 옳은 것이어서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전쟁 불사’를 외치는 군중 심리에 휘말리지 않고 ‘전쟁 하나도 벅차다(One War at a time)’는 슈어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인 사과성명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1월 남부의 외교사절을 석방해 영국으로 보냈다. 영국은 이를 외교적 승리로 받아들이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일각에서 미국과 전쟁을 통해 ‘북미 식민지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어도 정작 실현되지는 않았다. 부군 앨버트 공과 사별한 빅토리아 여왕이 정무를 돌보지 않은 탓이다. 원정계획도 무산돼버렸다. 링컨은 뒷수습에도 적극 나섰다. 노예해방 선언도 남부를 승인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명분을 먼저 선점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 링컨이 국무장관에게 양보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단일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구호에 집착하지 않는 실리 외교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셈이다.

한 가지 얘기 거리가 더 남았다. 윌리엄 슈어드 국무장관은 당초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던 최선두 주자였다. 경력도 링컨보다 화려하고 조직과 배경도 뛰어났다. 선거전 막판 승리를 거머쥔 링컨이 슈어드를 설득해 국무총리에 임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링컨은 슈어드의 꼭두각시’라는 평이 나올 만큼 비중이 큰 정치인이었다. 슈어드 자신도 국무장관직을 수락하면서도 ‘운이 나빠 졌다’고 여겼으나 점차 링컨에게 빠져들어 완벽한 호흡을 맞춰 나갔다.*

트랜트호 나포 사건을 해결하고 난 뒤 슈어드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무릇 대통령이든 국왕이든 권력자는 자기 주장에서 흠을 찾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미 합중국에는 다행스럽게도 논리적인 사고력과 이타적인 가슴을 모두 가진 대통령이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정치, 대통령과 각료 간 존경과 우정이 부럽다. 토론을 중시하고 남을 배려하는 대통령이 그립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링컨이 암살 당했을 때 가장 슬피 울었던 각료가 슈어드였다고 한다. 링컨을 승계한 앤드류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서도 국무장관직을 수행한 슈어드는 1867년 무수한 비난을 받으며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한 당사자로도 유명하다. 당시 ‘쓸모없는 땅’, ‘슈어드의 냉장고’로 불렸던 알래스카에서는 각종 천연자원이 솟아난다.

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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