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확정기부(Fixed Donation)’의 경제

임승태 전 금융통화위원





최근 유럽중앙은행(ECB) 국가들은 물론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일본 등 미국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이 모두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신용평가사 피치에 따르면 전 세계에 발행된 국채 중 약 3분의1에 해당되는 11조7,000억달러어치가 마이너스 금리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확정소득(fixed income)’이라 불리던 채권을 이제는 일정액을 기부해서 손해를 보게 하는 ‘확정기부(fixed donation)’라 불러야 한다는 비아냥이 나올 만도 하다.


이들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배경은 뭘까. 우선 유로 지역과 일본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물가안정을 전제로 잠재성장률과 실제성장률을 일치시키는 이론상의 자연이자율이 마이너스 상태라는 분석이 많았다. 따라서 경기를 부양하고 디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질금리를 이 자연이자율보다 더 낮출 필요가 있었다. 한편 덴마크·스위스·스웨덴 등 소규모 개방경제는 ECB의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통화가치 절상을 방어하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가 필요했다. 도입 이후 성장이나 물가 등이 기대에 못 미치고 일부 부동산 투기도 나타나지만 시장에서는 큰 무리 없이 작동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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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 금리는 세계 경제의 성장엔진이 멈춰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는 매우 치명적인데, 이제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꿈도 꿀 수 없고 오히려 향후 상당기간 우리 앞에는 종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스러운 저성장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내부적으로 저출산 고령화, 가계부채, 주요산업의 성장동력 약화, 물적 투자의 성숙화, 소득 불균형 심화, 구조조정 지연 등 만성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경제로서는 그야말로 ‘퍼펙트 스톰’이 닥친 것이다. 더욱 잔인한 것은 이러한 위험이 과거 IMF 경제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급격히 오지 않고 천천히 다가와서 경제주체들의 착각을 유발하고 또 천천히 오는 만큼 오랫동안 머무를 것 같다는 점이다.

우리의 타개책은 명확하다. 지금은 ‘고도성장’이 아닌 ‘좋은 성장(better growth)’을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잘못된 수요 진작책으로 억지성장을 꾀하기보다는 저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성장 동력과 역동성을 상실한 우리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완전히 바꿔나가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이력현상 방어에 유의하면서 재무적·사업적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중기적으로는 부족한 총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우리 산업의 구조를 수요지향형으로 바꾸는 한편,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키워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경제는 방향성 없이 너무 떠돌았고 대책 없이 너무 놀았다.

임승태 전 금융통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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