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가족주의의 종언

이연선이연선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일 두 번째 대국민사과에서 자신이 최소한 ‘가족’의 전횡을 막은 것은 인정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공감하기 어려웠다. 대를 이어 그 자리를 꿰찬 최순실씨 가족은 비선 실세의 권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산업화에는 ‘가족의 힘’이 큰 역할을 해왔다. 서양 근대사가 개인주의에 기반을 뒀다면 한국은 가족의 끈끈한 연대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적 토양을 구축했다. 가족 간 신뢰는 친척·지역으로 세를 넓혔고 산업·국가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법질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구성원 간 신뢰도가 낮았지만 공무원 조직과 대기업을 통해 그런대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가족주의의 시대가 저무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가족, 즉 내가 속한 집단을 도와야 하고 배신하면 안 된다는 정서가 강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것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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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박 대통령은 당선부터 가족주의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딸의 국정 능력을 과대 포장했다. 포장은 뜯겼고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콘크리트 지지율’로 불리던 대구·경북 지역 지지도는 30% 벽이 무너져 9%까지 내려앉았다.

기업 역시 가족주의의 해체로 궁지에 몰린 모습이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변화의 주문이 높아질수록 검증되지 않은 재벌 3·4세가 과연 한국의 간판 기업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최순실 사태에서 재벌 총수들의 뒷거래 의혹은 정경유착의 질긴 고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고 ‘아웃사이더’들의 분노는 더 뜨거워졌다.

최순실 사태는 박근혜 정권의 권력비리 문제와 함께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한국의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빈곤한지도 여실히 드러냈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투명한 법질서 아래에서 나와 다른 ‘남’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법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노동, 교육 모두 신뢰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문제다.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자녀들을 정권인수팀에 전면 배치했다. 미국 내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모습이다. 대통령의 자녀·형제도 모자라 이제는 친구까지 5년마다 등장하는 측근 비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우리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호기심보다 걱정이 앞선다.

이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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