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라이프

[휴] 지진 이겨낸 첨성대...달의 연못 월지..."너 반갑구나"

경주, 신라 천년역사를 걷다

신라시조 박혁거세 탄생신화 깃든 나정

천마총 등 고분 30여기 모여있는 대릉원

국찰로 이름 떨쳤던 분황사·황룡사터

발닿는 곳마다 1,000년 역사의 숨결이

신라 경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첨성대가 불빛에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다. 용도에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천문과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신라 경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첨성대가 불빛에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다. 용도에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천문과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


서울에서 달려와 경주 시내에 들어섰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물었다. 깜깜한 도로를 달려 마주한 것은 불빛에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첨성대다. 경주에 올 때면 언제나 먼저 찾는 곳이지만 이번은 더욱 특별하다. 경주 인근을 뒤흔든 지진으로 첨성대도 충격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반갑다, 첨성대야. 반갑다, 경주야. 이번 여행은 경주와 신라의 역사를 속성으로 살필 수 있는 코스로 구성했다. 역사서에 따르면 신라는 이곳 경주에서 기원전 57년에 건국했고 935년에 멸망했다. 거의 1,00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로마 정도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데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경우다. 책만으로는 알 수 없는 천년고도의 경주를 두 발로 확인해보자. 모든 코스가 15㎞ 정도에 퍼져 있다는 것도 경주 여행의 매력이다.

대릉원의 천마총. 하늘을 나는 말인 ‘천마도’가 나와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대릉원의 천마총. 하늘을 나는 말인 ‘천마도’가 나와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경주에서 제일 처음 방문할 곳은 탑동의 ‘나정’이다. 나정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이렇다. “기원전 69년 경주 인근 6촌 촌장들이 모여 있는데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가보니 백마 한 마리가 무릎 꿇고 있다 하늘로 올라가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다.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았는데 세상을 밝게 한다고 해서 ‘혁거세’로 이름 짓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은 ‘박(朴)’으로 했다.” 현재는 지난 1802년에 세운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 건물터, 우물터, 배수로 등이 남아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황남동 대릉원이다. 대릉원은 쉽게 이야기해 ‘왕들의 무덤’이다. 12만6,000㎦의 면적에 30여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대표는 155호분인 천마총. 여기에서 1만5,0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됐는데 유명한 ‘천마도’가 출토됐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신라금관 중 가장 큰 것도 나왔고 이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라의 별궁이던 월지. 한때 안압지로 불리기도 했지만 최근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신라의 별궁이던 월지. 한때 안압지로 불리기도 했지만 최근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다음 코스가 인왕동 첨성대다. 7세기 중엽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다. 용도에 대해서는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불교 건축물 등 다양한 주장이 나왔다. 어쨌든 현재 남아 있는 석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중에 하나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을 중심으로 362개의 돌로 12개의 기단을 쌓았다. ‘362’는 음력의 1년 날수고 ‘12’는 달수이니 천문과 관련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첨성대에서 큰길 하나만 건너면 별궁이던 월지가 있다. 과거 ‘폐허에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안압지’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1980년대 이곳에서 ‘월지’라고 쓰인 토기 파편이 발굴돼 원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동서 200m, 남북 180m, 둘레 1,000m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굴곡이 많아 어디에 서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안내판에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익숙한 조선시대 연못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인근에는 월성이 있다. 신라의 궁궐터로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 ‘반월성’ ‘월성’이라 불린다. 현재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관련기사



신라의 사찰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구황동 분황사와 황룡사다. 둘은 나란히 붙어 있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국찰로 이름을 떨쳤던 분황사는 지금 석탑 하나만 남아 옛날 명성을 되새기고 있다. 바로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은 돌을 마치 벽돌모양으로 쌓아올렸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역사상으로는 돌탑이 벽돌탑으로 바뀌는 전환기를 제시한다고 한다.

폐허로 남은 황룡사터의 전경. 이곳에 높이 80m의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다.폐허로 남은 황룡사터의 전경. 이곳에 높이 80m의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다.


더 아까운 것은 황룡사터다. ‘황룡사 9층목탑’이 있던 곳이다.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이 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현재는 가람들에 사용된 추춧돌만이 남아 너른 공간을 채우고 있다. 황룡사 9층목탑을 오는 2025년까지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 두고 볼 일이다.

하루에 끝나는 이러한 ‘단기 속성’의 신라 역사 탐방에서 보통 마지막은 배동 포석정터다. 원래는 포석정도 왕의 별장이었다.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수로가 남아 있다. 평범한 별장이 유명해진 것은 신라 말 이곳에서 왕(경애왕)이 유흥을 즐기고 있을 때 후백제군으로부터 습격을 당했다는 전승 때문이다. 왕은 포로가 되고 이후 신라는 급전직하로 추락한다. 포석정은 신라 종말의 상징이다.

/글·사진(경주)=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최수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