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폭군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내관 김처선은 현장에서 팔·다리가 잘려 죽었다. 전제군주 시절에 간언을 하려면 신하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어명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왕의 심사를 건드려 대역죄로 몰리면 삼족이 멸족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김처선은 궁중 제반 업무를 총괄하던 정 2품 벼슬로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이다.
헌정 사상 첫 피의자 대통령이라는 참담한 작금의 사태에 옛 충신을 떠올리는 것은 간언하는 신하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전제왕조도 아니고 견제와 균형이 조문화한 법치 국가에서 말이다.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면 고작해야 면직이다. 청와대 비선실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던 친박 세력과 참모들은 이제 와서 ‘(국정 농단 배후인) 최순실이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며 모두 박근혜 대통령(박통)이 지시해서 한 일이라고 둘러댄다.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을 강요했던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도, 사기업인 CJ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압박했던 조원동 전 경제수석도 모두 박통이 시켜서 했다고 검찰에서 밝혔다. 박통이 그토록 싫어하는 ‘배신의 정치’가 판치고 있지만 그의 업보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그의 행태가 청와대와 각료 집단을 간신만 우글거리는 소굴로 만들었다.
국민과의 소통은 사라지고 문고리 권력과 장관들은 그가 지시하고 원하는 것만 비서관 회의에서, 각료 회의에서 받아 적었다. 박통은 최순실과는 수시로 청와대에서 만나는 것은 물론 국무회의 자료, 외교 기밀문서 등을 일상적으로 최씨에게 건네줬다.
왕 실장으로 불리며 청와대 비서실을 총지휘했던 김기춘은 최순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하지만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구속된 김종 전 차관은 최순실을 김기춘의 소개로 알게 됐다고 검찰에서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 작성에 관여하고 노태우 정부 시절 검찰총장을 지낸 그는 지역감정 조장의 화신이다. 지난 1992년 대선 때 부산경찰청장 등 기관장을 모아놓고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표 몰이에 나선 ‘초원 복집’ 사건이 유명하다.
2013년 비서실장에 취임한 김기춘은 검찰의 국정원 대선 부정선거 개입 의혹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검찰 출신 우병우를 끌어들여 검찰 조직 장악에 나선다. 법대로 부정선거 사건을 수사하던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돌연 ‘혼외자 의혹’이 터진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황교안 국무총리가 진상 조사에 나서라고 지시하면서 채 총장은 옷을 벗는다. 이후 검찰은 권력의 하수인이 됐다. 국민들은 검찰을 권력의 시녀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검찰이 시녀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정권이 입맛대로 검찰 인사를 통해 수족으로 부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검찰은 언론에 떠밀려, 100만 촛불 시위에 놀라 주인(?)을 물려고 하고 있다.
성숙한 민주공화국은 검찰·국정원·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사회정의를 실현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정권이 이들 기관에 개입하면 국민이 아니라 상사에게 충성하는 간신이 판치게 된다. 물론 달콤한 말만 듣고 싶은 오만한 혼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박통은 배신보다 더 싫어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하극상이란다. 혼군과 간신은 일란성 쌍생아다.
범죄 피의자 박통이 여론에 의한 마녀 사냥이라며 헌법과 법률로 진검 승부하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더라도 마지막 관문인 헌법재판소가 자기편이 될 수 있다는 포석이다.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한 국민이 부여한 주권을 수백만 촛불시위로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곧 대선이 다가온다. 민주주의는 무혈혁명이라는 선거를 통해 이뤄진다. 누구의 딸이라는 이유로, 경제를 살릴 것 같아서 등의 막연한 이유로 이제는 지도자를 뽑지 말자. 유권자인 우리가 혼군부터 가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y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