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대륙봉쇄령의 빛과 그림자





전쟁과 역사. 나폴레옹처럼 전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도 없지만 나폴레옹이 내린 대륙봉쇄령만큼 19세기 이후 역사에 영향을 미친 사건도 드물다. 대륙봉쇄령은 브라질의 탄생과 커피, 오스트레일리아의 번영, 독일 제조업의 융성과 미국의 발전, 제정 러시아의 정체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나폴레옹부터 보자. 60전55승5패. 군사적 천재이며 풍운아 나폴레옹의 전적이다. 9할이 넘는 승률에도 끝내 영국에 무릎 꿇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답은 ‘경제’에 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의 함대에 패해 육군을 보내 영국을 점령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그는 1806년 11월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직후 ‘베를린 칙령’을 발표, 영국과의 무역을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영국은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유럽의 전 해안에 대한 봉쇄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1807년 11월에는 긴급명령 형식으로 프랑스 및 그 동맹국과 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영국 해군 함정으로 프랑스 및 동맹국의 해안을 봉쇄한다고 발표했다. 나폴레옹은 한 수 더 나갔다. 베를린 칙령보다 훨씬 강력한 내용을 담은 밀라노 칙령을 1807년11월23일자로 내렸다.

밀라노 칙령의 특징은 앞서 선포한 베를린 칙령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합리성과 포용성을 없앴다는 점. 프랑스나 동맹국 항구에 기항하는 선박에서 영국산 물품이 발견될 경우, 물품만 압수하던 베를린칙령과 달리 선박까지 통째로 압류해버렸다. 영국산 물품을 적재한 어떤 국가의 선박도 나포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약 1년의 간격으로 나온 나폴레옹 황제의 두 가지 명령, 베를린 칙령과 밀라노 칙령의 통칭이 바로 대륙봉쇄령이다.

나폴레옹의 노림수는 영국 경제의 붕괴. 막강한 영국 해군에 막혀 도버 해협을 건널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해상 교통을 금지하면 대외무역의 비중이 큰 영국이 고통 당할 것이라고 믿었다. 황제의 대륙봉쇄령은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가뜩이나 1786년 체결한 이든 조약(Eden Treaty)으로 영국과 저율 관세가 적용되는 자유무역을 시작한 뒤 제조업 기반이 무너졌던 상황. 영국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었던 시기였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국민의회가 이든조약을 폐기한데 이어 ‘영국산 물품 반입 금지법안’ 제정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목적은 나폴레옹과 같았다. 프랑스가 문을 닫으면 숙적인 영국의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다. 탁상공론으로 끝났던 국민의회의 법안을 나폴레옹은 더욱 강화해 황제의 힘으로 밀어 부쳤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에서 이탈하려는 동맹국들에게는 으름장을 놓았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영국은 고통 받았을까. 그랬다. 대외 무역이 25%~55%까지 줄었다. 문을 닫는 제조업체가 생기고 곡물 가격의 폭등 속에 인플레이션 현상도 일어났다. 재정도 거덜 났다. 돈이 얼마가 들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프랑스 견제에 나섰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국채 발행은 결국 국가를 파멸로 이끈다’고 경고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1776년 영국 정부의 채무는 1억2,400만 파운드.

미국 전쟁이 끝난 1783년 2억3,000만 파운드에서 대륙봉쇄령 직전 5억700만 파운드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는 10억 파운드까지 뛰었다. 국내총생산에 대한 국채 비중도 260%로 아직까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차세계대전 시작 직전 채무가 5억8,700만 파운드, 지출이 극심했던 2차세계대전 직후 GDP에 대한 국채 비중이 230%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당시 영국 경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준다.

프랑스의 비극은 영국보다 프랑스 진영의 피해가 더욱 컸다는 점. 바다를 지배한 영국은 두 가지 통로가 있었다. 하나는 카리브해를 비롯한 비유럽지역과 무역. 대륙봉쇄령 초기의 유럽 지역 무역 감소분 이상으로 비유럽지역에 대한 수출입이 늘어났다. 고통 속에서 수출입선 다변화를 이룬 셈이다. 두 번째 통로는 밀수. 섬유 등 영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워낙 뛰어나 프랑스조차 육군의 군복을 제작하며 영국산 밀수 원단을 사용할 정도였다.

동맹국들과 선박회사들의 고통은 더욱 컸다. 이미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산 물품이 없는 선박을 찾기 어렵던 시대에 프랑스 해군이나 세관에 걸리면 배까지 빼앗겼다. 서구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인 메수엔 조약(1703)을 체결한 이후 영국과 경제적 특수관계를 이어가던 포르투갈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러시아 귀족들도 들끓었다. 농노들이 생산한 곡식을 영국에 수출해 왔는데 대륙봉쇄령이 발동되며 소득원이 막힌 탓이다.


나폴레옹은 약한 고리부터 손댔다. 스페인을 통해 포르투갈에 군대를 보내자 포르투갈 왕실 일가는 브라질로 망명해버렸다. 브라질은 이 때부터 세계적인 커피 생산지대로 떠올랐다. 커피의 주산지인 아프리카로 가는 항로가 대륙봉쇄령으로 막힌 덕분이다. 브라질 국가의 탄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포르투갈 왕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홀로 남았던 왕세자는 1822년 ‘독립이냐 죽음이냐’를 외치며 브라질 독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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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로 진주했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또 다른 밀수의 중심지인 스페인으로 짓이겨 들어가 학살극까지 펼쳤다. 화가 프란시스 고야가 남긴 ‘1808년 5월3일의 학살’은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스페인 민중은 웨즐리 준장(훗날 웰링턴 경)이 지휘하는 영국군 소부대, 잔존 포르투갈 군대와 힘을 합쳐 게릴라 전술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게릴라’라는 단어가 이때부터 쓰였다). 프랑스군 20만명의 대병력은 전쟁 내내 이곳에서 발이 묶였다.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혔다’고 한탄하게 만든 이베리아 전선보다 더욱 끔찍한 상황도 찾아왔다. 귀족들의 성화로 영국과 곡물 밀수를 늘리고 대륙봉쇄령 이탈을 선언한 러시아를 나폴레옹은 그냥 둘 수 없었다. 60만 대병력을 동원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전선은 한 없이 늘어져 속전속결형인 프랑스군에게는 낯선 전투였다.

더욱이 프랑스군은 보급에 한계를 갖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프랑스군은 비축한 물자보다 점령한 현지에서 물자를 징발하는 약탈형 군대로 바뀐 상황. 식량과 물자를 불태우며 철수하는 러시아군의 청야(淸野)작전으로 굶주렸다. 혹독한 동장군까지 만난 나폴레옹은 결국 회복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영국을 잡으려던 대륙봉쇄령이 프랑스와 자신을 속박한 셈이다.

대륙봉쇄령은 프랑스의 무역과 산업도 멍들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주요 무역항구들이 생기를 잃고 그나마 유지하던 무역 점유율도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경제공동체를 꿈꿨지만 산업혁명으로 저만큼 앞서 나간 영국의 생산력을 대신할 국가가 없었다. 프랑스가 점령했던 이탈리아의 비단 산업을 비롯한 섬유산업도 대륙 봉쇄령 탓에 시장을 잃고 다시는 소생하지 못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새롭게 부상한 지역도 적지 않다. 스페인산 양모에 의존해 모직산업을 영위하던 영국은 대체 수입선을 찾던 중 호주에 주목했다. 죄인들의 유배지였던 호주는 대륙봉쇄령 덕분에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양모 수출 지역으로 거듭났다. 독일도 수혜국가로 꼽힌다. 영국에 견줄만한 산업단지로 주목돼 집중적인 지원책을 받았던 루르 지역을 차지하게 된 프로이센은 유럽의 열강에서 최강국으로 변신하는 기회를 잡았다.

미국과 영국 간 1812년 제 2차 영미전쟁(1차 영미전쟁은 미국 독립전쟁)이 터진 것도 대륙봉쇄령이 남긴 후폭풍의 하나다. 미국 대통령 관저는 당시 영국군의 방화로 검게 불탄 흔적을 감추려 흰색을 칠한 이후로 ‘백악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미전쟁의 발단은 해군 수병 부족 현상에 시달리던 영국 해군이 미국 상선을 나포해 마구잡이로 입대시킨 데서 비롯됐으나 그 바닥에는 중립국으로서 프랑스를 도와주던 미국에 대한 영국의 견제심리가 깔려 있었다. 영미 전쟁은 승패 없이 끝났다고 하지만 미국은 이때부터 영국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났다. 미국은 건국(독립전쟁)에서 기틀을 잡기까지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신세를 진 셈이 된다.

대륙봉쇄령에 대한 불만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러시아는 전쟁 이후에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서구와 야만의 중간 쯤에 있던 덩치 큰 나라’에서 ‘당당한 유럽국가’로 자리 잡은 러시아는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며 개혁과 내실보다 외양 확대에만 골몰한 결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맞아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췄다.

유럽의 사설 금융업자에 머물던 유대인들이 대거 전면에 등장한 것도 대륙봉쇄령의 영향이 크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세계를 호령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과 대륙간 밀수로 거대한 부를 쌓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켜 세운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대륙봉쇄령으로 수출이 안됐거나 공장에 쌓인 물품을 헐값으로 사들여 밀수선을 통해 대륙에 팔아 떼돈을 벌었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애초부터 정해진 수순인지도 모른다. 세금을 누가 많이 내느냐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으로 정권을 잡아 완전한 세금 개혁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크게 늘어난 군비 지출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경제적 대안으로 삼은 대륙봉쇄령도 통하지 않자 나폴레옹은 군사비 조달의 원천을 정복지 수탈에서 찾았다. 혁명의 전파를 기대했던 유럽 지식인들은 ‘약탈경제’에 등을 돌렸다. 세수확보 없이 밀어붙인 재정확대가 나폴레옹의 몰락을 앞당겼다.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려는 미국의 새 대통령과 나폴레옹이 닮은 구석이 있다면 무리일까.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 영국이 유럽의 일원에서 벗어나려는 브렉시트(Brexit) 역시 대륙봉쇄령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봉쇄의 주체만 바뀌고 있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이라는 정책적 실수 이외에도 도덕적 흠결로 무너진 것으로 전해진다. 밀수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나폴레옹은 물론 친인척들은 밀수선단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쌓아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국민적 신망을 받던 리더가 측근 비리와 자신의 비도덕적 행위로 위기를 자초하는 게 남의 일 같지 않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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