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이라는 단어가 ‘산을 올라가다’쯤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았는데 어원을 찾아보니 ‘불룩 나온 땅’을 일컫는 제주의 방언이란다. 10여년 전 필리핀 남부의 섬 보홀을 취재 갔을 때 그곳에도 수많은 오름들이 있었다. 제주도 오름들이 한라산 사면에 주로 위치하는 데 비해 보홀의 기생화산들은 평지에 불룩 솟아 있었다. 미국의 통치를 받았던 필리핀에서는 그것들을 ‘초콜릿힐(초콜릿언덕)’이라고 불렀는데 현지 안내인은 “미국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생산되는 허시초콜릿의 모양과 비슷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주의 오름과 필리핀의 초콜릿힐은 규모 자체가 다르다. 제주 오름들의 크기가 웬만한 동산만 한 데 비해 보홀의 초콜릿힐은 크기가 현저히 작다. 제주 오름을 취재하기로 한 것은 제주에 살고 있는 지인의 추천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늦가을에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연히 오름의 억새를 구경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 말에 솔깃해진 기자는 취재여행을 가는 여느 목요일 새벽처럼 보따리를 싸서 공항으로 향했다. 이왕 취재하기로 한 김에 오름의 정의를 살펴보니 ‘한라산의 산록에서 해안까지 분포하는 개개의 분화구를 갖고 있는 소형 화산체’라고 기술돼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전적 정의보다는 학술적이다.
제주도에는 모두 368개의 오름들이 있는데 서귀포에 있는 오름의 수는 158개로 전체의 43%에 달한다. 오름은 외견상 야트막한 동산의 모습이고 그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가 뻥 뚫린 웅덩이처럼 보이는데 지질학자들은 그 모습에 따라 말굽형·원추형·원형·복합형 등으로 나눠놓았다.
제주에 있는 368개의 오름 중에서도 억새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은 단연 따라비오름이다. 따라비오름은 크고 작은 굼부리(분화구)가 여러개 분포돼있는 원뿔형으로 면적은 약 44만8,111㎡이며 둘레 2,633m, 높이는 342m에 달해 낮은 산의 규모다. ‘따라비’의 어원은 땅할아버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의 근거는 문헌에 지조악(地祖嶽)이라는 문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곳 억새의 아름다운 풍광이 입소문을 탔는지 주차장은 몹시 붐볐다. 다만 차를 따라비오름 밑에 있는 간이주차장에 대고 정상까지 걷는 시간은 천천히 가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데크와 계단이 잘 정비돼 있는데다 경사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따라비오름의 억새군락은 오름 아래서부터 시작된다. 저지대에 듬성듬성 퍼져 있던 억새들은 산으로 올라가면서 바다를 이룬다. 특히 오름 안쪽 분화구는 억새의 바다다. 능선을 따라 오름정상까지 올랐다가 분화구 안쪽으로 이어지는 사면의 군락은 특히 조밀하다. 다시 오름 가장자리로 올라오니 해가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고 있다.
능선 서쪽으로는 풍력단지의 풍차 여러 대가 바람을 맞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쪽으로 떨어지는 일몰이 아름다울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 11월 중순의 제주 바람은 쌀쌀해서 이내 한기가 몰려왔지만 일몰을 배경으로 한 억새밭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잠시 후 사진기를 어깨에 멘 젊은 남녀들이 몰려와 서로서로 모델이 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추위쯤은 아랑곳 않고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이 싱그러웠다.
젊음을 소진한 기자의 몸은 으슬으슬 떨렸다. 해는 거의 떨어졌지만 지평선 쪽의 하늘은 구름의 차지였다. 해는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기대했던 사진을 건지지 못하고 오름 아래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름을 내려오는 동안 땅거미가 내려앉은 대지는 어둠에 묻혔다.
차에 앉아 히터를 켜고 더운 공기를 쐬자 몸이 녹기 시작했고 윗니와 아랫니가 마주치던 소리도 이내 잦아 들었다. 제주시 쪽으로 차를 운전해가는 동안 어둠의 농도는 더욱 짙어져 푸르렀던 제주의 하늘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글·사진(제주)=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