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안종범·정호성의 범죄행위와 관련해 검찰 공소장에 구체적으로 적시된 기업은 총 다섯 곳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기업인 그랜드코리아레저(GKL)를 제외한 민간기업은 현대자동차·롯데·포스코·KT다. 이 중 롯데를 제외한 3개 기업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민연금은 현대차(8.02%), 포스코(10.62%), KT(10.47%)의 대주주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를 지원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국민연금이 지분 8.96%를 보유하고 있다. 국민들이 낸 돈을 알뜰히 굴려 수익을 내야 하는 국민연금이 이들 기업의 주식을 많이 보유한 것은 그만큼 안정적인 투자처이자 국가 경제를 위해 매우 중요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업들이 최씨 일당의 먹잇감이 돼 각종 이권 청탁을 들어주고 많게는 수백억 원의 ‘삥’을 뜯겼다니 통탄할 일이다.
이들 기업이 대통령과 공모한 국정농단 세력에게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삥을 뜯겼는지는 5,000만 국민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국내 대표기업들이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해당 기업들은 “정권 차원에서 요구하는데 거부할 수 있는 기업이 있겠느냐”며 항변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취약한 지배구조와 허술한 경영 시스템을 자인하는 꼴이다. 대가를 바라지는 않더라도 권력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돌아올 불이익이 두려워 청탁을 들어주고 돈을 건네야 할 정도로 약점이 있거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기업인 포스코와 KT가 왜 최고경영자(CEO) 선임 때마다 몸살을 앓고, 낙하산을 타고 정권 인사가 임원 자리를 꿰차며 각종 청탁을 들어줘야 하는가. 정권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경영진도 문제지만 외풍을 막아줘야 할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CEO 선임 때마다 외압 때문에 내홍을 겪으면서 늘 이사회를 강화해 책임경영을 하겠다고 부르짖었지만 이제 보니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사회가 열렸다손 치더라도 ‘거수기’에 불과한 사외이사들이 입바른 소리를 하고 제동을 걸었을까 싶기도 하다. 현대차가 정유라의 동창생 학부형의 회사로부터 납품을 받은 과정을 보면 글로벌 기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정유라에게 말을 사주는 등 300억원 가까이 뜯긴 삼성도 마찬가지다. 안정적인 3세 승계나 사업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들이나 주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긴 것은 분명하다.
다음달 6일 열리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대기업 총수들이 출석한다. 대가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조 위원들이 총수들을 몰아세울 것이다. 이 장면을 TV로 보는 국민들의 반기업정서가 더 커질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기업들은 이번 사태를 환골탈태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4류 정치’와 ‘3류 행정’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 선진적 지배구조와 경영 시스템을 갖추는 데 속도를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참담하고 굴욕적인 일이 재발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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