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숱한 퇴진 요구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조건부 퇴진 의사를 밝혔다. 제5차 촛불집회와 정치 원로들의 ‘질서 있는 퇴진’ 건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나빠질 대로 나빠진 여론을 더는 돌릴 수 없다는 판단과 정치 원로들의 건의로 촉발된 ‘퇴진론’ 확산에 국정운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던 박 대통령도 결국 고개를 떨구게 됐다.
지난 26일 제5차 촛불집회에는 사상 유례없는 190만명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평화시위를 벌였다. 지난 12·19일 집회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지만 한쪽에서는 궂은 날씨 탓에 가족 단위의 참석자가 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왔다.
박 대통령이 지난주 검찰의 조사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세월호 7시간’에 대한 보도가 쏟아지자 집회 참석 여론은 들끓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참모들은 이날 3·4차 촛불집회 때와 마찬가지로 청와대로 출근해 정국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5차 촛불집회 다음날인 27일에는 전직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등 정치 원로들마저 박 대통령 퇴진 요구에 힘을 보탰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강창희·김원기·김수한·김형오·박관용·박희태·임채정·정의화 전 국회의장, 권노갑·김덕룡·신경식·신영균·정대철·이종찬 전 의원 등 여야 정치 원로들은 이날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회동하고 박 대통령에게 ‘하야 결단’을 촉구했다. 차기 대선 등 정치 일정을 고려해 내년 4월까지 물러나라는 것이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발의가 임박한 시점에서 박 대통령에게 ‘퇴진’의 길을 열어주자는 게 원로들의 주장이다.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명예는 지킬 수 있도록 ‘파면’만은 막자는 것이다.
이튿날 청와대는 원로들의 건의에 대해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며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조만간 3차 담화나 회의 형식을 빌려 퇴진에 대한 입장을 낼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요동치자 박 대통령의 정치세력인 친박계도 움직였다. 서청원·최경환·윤상현 등 친박계 핵심 중진들은 28일 서울 마포에서 비공개 오찬 회동을 갖고 박 대통령에게 ‘명예퇴진’을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 의원은 오찬 직후 기자들과 만나 ‘청와대에 질서 있는 퇴진을 건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런 이야기도 했고 그 부분에 공감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야권과 비박계의 비난에도 꿈쩍 않던 친박계가 움직인 것은 전날 원로들의 제안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박 대통령이 29일 오후 3차 담화를 발표하기에 앞서 청와대에서는 ‘하야설’이 나돌았다. 애초 이날 오후2시로 예정됐던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는 3시 이후로 미뤄졌고 박 대통령은 그 사이 3차 담화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