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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뷰] 불통의 시대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상...'한반도’ 안성기부터 ‘판도라’ 김명민까지

한국영화에서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군부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1980년대까지 영화에서는 ‘대통령’의 등장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고, ‘영화검열’이라는 사슬이 존재하고 있기에 감히 정치권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어왔다.

한국의 영화계에 봄이 오기 시작한 것은 1989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기반이 다져진 시기와 동일하다. 1991년 강우석 감독은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를 통해 계엄사령관 출신 여권 차기 대권주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 스릴러로 정치계의 추악한 이면과 섹스 스캔들을 정면으로 그려내며 ‘투캅스’에 앞서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영화 ‘판도라’ 김명민 / 사진제공 : NEW영화 ‘판도라’ 김명민 / 사진제공 : NEW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도 한국영화계에서 ‘대통령’의 존재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 사태의 이면을 그려낸 ‘그때 그 사람들’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복수를 위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이야기가 그려진 ‘26년’, 그리고 역시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대통령이 등장하는 ‘효자동 이발사’의 경우처럼 실존했던 대통령을 영화에 등장시키는 경우는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등의 복잡한 소송과 함께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첨예한 논란이 빚어지곤 했다.

그래서 2000년대 등장하는 한국영화부터는 실존했던 대통령이나 실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인용한 가상의 캐릭터를 대신해, 현실에 존재한 적 없던 새로운 대통령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가상의 대통령들은 영화가 개봉한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국민들이 원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투영해내기 시작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봉한 전만배 감독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이런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대통령 캐릭터의 좋은 예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 제작되던 2002년은 김영삼에서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삼김(三金)정치가 막을 내리고 이회창과 노무현, 정몽준 등 기존의 정치세력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세력의 탄생이 임박한 시기였다.

전만배 감독은 군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시작해 구세대의 보스정치를 대변하는 삼김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세력의 탄생을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통해 영화에 투영해낸다.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시민들과 소통할 뿐 아니라, 중년의 나이에 딸의 담임선생님 은수(최지우 분)와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대통령 민욱(안성기 분)의 모습은 바로 시민들이 원하는 새로운 대통령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 안성기 / 사진제공 : CJ엔터테인먼트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 안성기 / 사진제공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한반도’ 대한민국 대통령 안성기와 북한 주석 백일섭 / 사진제공 : CJ 엔터테인먼트영화 ‘한반도’ 대한민국 대통령 안성기와 북한 주석 백일섭 / 사진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시민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며 연하의 여교사에게 프로포즈를 하던 낭만적 대통령을 연기한 안성기는 2006년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에서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강한 대통령으로 돌아온다.


‘한반도’가 제작된 2006년은 일본 내부에서 우경화 정책이 진행되며 한일관계에 조금씩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이며, 또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태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강한 대통령’을 열망하는 목소리가 들여오던 시기였다. 그래서 ‘한반도’의 안성기는 ‘피아노 치는 대통령’과는 정반대의 강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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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개봉한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에는 세 명의 인간적인 대통령이 등장한다. 거액의 로또 당첨금 앞에 고민하는 김정호(이순재 분)와 강렬한 키라스마의 젊은 미남 대통령이지만 사랑 앞에 약한 차지욱(장동건 분), 그리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지만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한경자(고두심 분)까지 세 명의 다른 대통령이 등장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진지한 정치영화라기보다 대통령 또한 평범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려낸 휴먼 코미디 장르의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2009년은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 냄새 나는 대통령에 대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드높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굿모닝 프레지던트’ 역시 사람 냄새 나는 인간적인 대통령을 원하는 시민들의 열망을 반영해낸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세 대통령 이순재, 장동건, 고두심 / 사진제공 : CJ 엔터테인먼트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세 대통령 이순재, 장동건, 고두심 / 사진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감기’ 차인표 / 사진제공 : 아이러브시네마영화 ‘감기’ 차인표 / 사진제공 : 아이러브시네마


2013년 개봉한 김성수 감독의 ‘감기’에도 대통령(차인표 분)이 등장한다.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로 국가가 위기에 빠진 초유의 사태를 그려낸 재난영화인 ‘감기’에서 차인표는 바이러스가 발생한 성남 지역을 폐쇄하고 폭격으로 성남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려 바이러스를 퇴치하겠다는 미군의 공격을 강하게 막아내는 자주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기’에서 차인표가 연기한 대통령의 이미지는 재난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의 이미지지만, 그 이면에는 2011년 비준된 한미 FTA에 대한 반발감이 숨어 있다. “감염된 분당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냐?”고 외치며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면 바로 격추를 시키라고 강경지시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시민들이 원하는 미국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인 대통령의 이미지였다.

같은 재난영화지만 오는 12월 7일 개봉을 앞둔 ‘판도라’의 대통령 김명민은 ‘감기’의 대통령 차인표와는 또 다른 케이스다. 김명민과 차인표 모두 단 한 명의 국민도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에 가득찬 대통령이지만, ‘판도라’의 김명민은 국민을 구하겠다는 그 마음으로 인해 결정적인 판단 실수를 범하며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려는 위기 상황에서도 시민들을 모두 안전권으로 대피시키지 않으면 고압 가스 배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독단이 결국 폭발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영화 ‘판도라’에서 대통령을 연기한 김명민과 국무총리를 연기한 이경영 / 사진제공 : NEW영화 ‘판도라’에서 대통령을 연기한 김명민과 국무총리를 연기한 이경영 / 사진제공 : NEW


하지만 ‘판도라’에서 김명민의 대통령 캐릭터가 특별해지는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다. 김명민은 자신의 판단 착오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자 이를 솔직히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사과하고 국민들의 협조를 요청한다. 이런 김명민 대통령의 솔직한 자기반성은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현직 대통령의 모습과 적나라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영화촬영에만 1년 6개월, 시나리오부터 제작완료까지 4년의 시간이 투입된 ‘판도라’가 2016년 11월부터 진행되는 이 국정농단 사태와 대통령의 치졸한 대응을 예상하고 만들어진 영화는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현 대통령의 집권 이후 꾸준히 이어진 불통의 시대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빚어낸 참담한 현실로 인해 정치권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지금 원하는 대통령상이 바로 솔직하게 사과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이란 것이고, ‘판도라’는 김명민을 통해 그런 대통령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영해내고 있다.

원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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