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백색의 함대, 미국의 시대를 열다





1907년12월16일, 미국 버지니아주 햄프턴 로드항. 관중의 환호 속에 해군 함정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1만1,520t에서 1만6,000t까지 대형전함의 총톤수만 22만4,705톤. 보급함과 병원선·구축함으로 구성된 보조함대까지 합쳐 모두 28척의 함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용 요트 메이플라워호에 사열하며 체사피크만을 빠져 나갔다. 영국의 북해함대를 제외하고 단일 선단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함대가 세계 일주에 나선 순간이다.


미국은 이 함대에 ‘위대한 백색의 함대(the Great White Fleet·大白艦隊)’라는 이름을 붙였다. 함대의 명칭처럼 이 함대는 크기도 컸거니와 매우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 미국이 내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게 이 함대에 부여된 목적. 특이하게도 이 함대는 하얀 색을 입었다.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저시인성(低視認性·invisibility) 도색인 회색 대신 백색 페인트를 칠한 이유는 ‘평화 이미지’ 때문이다. 함수 부분은 황금색으로 도색한 이 함대의 기항지에는 환영 인파가 몰렸다.

카리브해와 브라질을 거치며 석탄을 가득 보급받은 대백함대가 미주대륙 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 무렵에는 아르헨티나의 거센 항의도 받았다. ‘왜 브라질은 방문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스쳐 지나 가냐’고. 유럽 국가들에게 부채를 잔뜩 지고 있던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대백함대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미주대륙을 크게 돌아 멕시코를 거친 대백함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더 큰 환영을 받았다. 서부의 미국인들은 ‘크고 아름다운 미국 전함’에 자긍심을 가졌다.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서부지역 6개 항구를 돌 때마다 대규모 행사도 치러졌다. 수병들이 의장대 시범을 비롯한 시내 행진을 펼칠 때마다 미국인들은 환호했다.

대백함대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애국심 고양. 마침 샌프란시스코가 일본인 이민제한 및 백인과 일본인이 한 교실에서 수업받는 공학(共學) 금지를 발표해 긴장이 높아지던 시절이었다. 청나라와 러시아까지 제압한 일본이 미국도 침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서부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자는 게 대백함대가 맡은 국내 임무였다. 루스벨트가 추진하던 미국 해군 증강 정책을 줄기차게 반대하던 서부 지역 의원들의 생각을 돌리자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력 증강을 줄기차게 추진해 이미 커다란 성과를 내고 있던 터. 1차 태평양전쟁(1879~1882)** 당시 페루나 볼리비아, 칠레 해군보다 약했던 미국 해군을 단시일에 세계 2, 3위의 전력으로 끌어 올린 루스벨트는 미국 함대를 더욱 키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문제는 돈. 모두 20세기 이후에 건조된 대백함대의 최신 전함 16척을 건조하는데 척당 400만~700만 달러의 예산이 들어갔다. 함대의 운용 유지비도 갈수록 늘어나던 시절에 루스벨트는 의회의 원군 확보와 여론의 지지를 위해 대백함대의 순항이라는 이벤트를 펼쳤다.

대백함대의 다음 순항지는 오세아니아주.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에서는 10만 인파가 미국의 대백함대를 환영했다. 열흘 뒤 호주의 시드니항에는 6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국의 퇴보가 뚜렷하고 일본의 기세가 분명해지는 분위기에서 고립될 수도 있고, 영국의 안보 우산이 사라질까 떨던 뉴질랜드와 호주로서는 같은 앵글로 색슨의 대규모 함대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대백함대에 자극받은 호주는 영국과 별도로 자기의 예산을 들여 해군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대백함대의 기항 이후부터다. 1952년 체결된 호주·뉴질랜드·미국간 상호방위조약인 앤저스(ANZUS)조약도 이 때 씨앗이 뿌려졌다.

대백함대는 일본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환영을 받았다. 일본 해군은 연합함대를 편성해 대백함대와 나란히 요코하마항에 입항하는 행사를 치렀다. 6개월 동안 예행연습을 했던 어린이 5만명은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 국가를 부르고 일본왕은 백색함대의 장교들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었다. 미국의 이민 제한, 샌스란시스코시 당국의 일본인 차별 문제로 들끓던 대미 개전론(對美 開戰論)도 쏙 들어갔다. 대백함대의 진짜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대백함대는 중국의 불만을 샀다. 함대를 둘로 쪼개 반쪽만 기항시켰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가 지난해 ‘아시아 리뷰’에 기고한 연구논문 ‘1894~2014년간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선호’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이 때부터 일본을 중국보다 훨씬 중시하는 동아시아정책을 펼쳤다. 대백함대의 출항 전부터 석탄 보급을 위한 기지로 개발했던 필리핀 수빅만과 싱가포르, 수에즈운하를 거치는 동안 대백함대의 순항 소식은 세계적인 뉴스 거리로 떠올랐다. 대백함대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때 이탈리아 시실리 지진 소식을 듣고 분견함대를 급파, 구호활동에 나서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도 남겼다.지중해를 거친 대백함대가 출항지인 햄프턴 로드 항구에 도착한 시기는 1909년2월22일. 432일간 8만2,000여㎞를 항해하며 미국에 돌아온 함대에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퇴임하기 직전인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백함대의 기함인 전함 코네티컷의 함포 포탑 위로 올라가 수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웅장한 단상 위에서 나는 감히 말한다. 다른 나라들도 이 같은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마다) 여러분들이 지나온 길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수병들은 함성을 질렀다.***

대백함대의 항해는 가장 요란하게 가장 효율적인 성과를 거둔 ‘포함외교’로 평가받는다.(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행한 ‘함대 방문-외교 조약 체결’패턴은 프랑스함대의 1891년 러시아 방문이 대표적이다. 크림전쟁에서 피흘렸던 두 나라는 함대 방문으로 동맹을 맺었다) 미국의 대백함대는 한꺼번에 여러 국가를 상대로 포함외교를 펼쳤다. 군사적으로도 결실을 얻었다. 함정끼리 무선통신이 자리잡은 게 이때부터다. 대백함대는 포레스트 박사의 발명에 힘입어 120㎞ 떨어진 함정끼리 무선으로 교신하는 방법을 정착시켰다.

대백함대의 세계 일주는 미국의 상선대 확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문제는 연료 보급. 석탄 보급을 위해 대백함대는 38척의 민간인 선박과 계약을 맺었으나 미국 국적의 선박은 달랑 8척. 나머지 30척은 영국 선적의 민간 화물선이었다. 하와이 진주만이 해군 군항으로 본격 개발된 것도 대백함대의 순항 이후다. 대양함대 운용에 보급 기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미국은 대백함대가 출항한 직후 진주만 해군 군항 개발을 위한 긴급예산 100만 달러를 편성했다.


대백함대의 항해가 주는 함의(含意)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세계 경찰국가 미국’의 뿌리가 바로 루스벨트의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이고 대백함대는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대외정책도 루스벨트라는 키워드로 설명이 가능하다. 최정수 교수의 연구논문 ‘조지 부시 독트린의 역사적 기원’(2003)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 이래 미국이 취하고 있는 선제 공격과 일방주의, 헤게모니의 원형이 바로 루스벨트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도 루스벨트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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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전함’을 위협 요인으로 봤다. 범선과 달리 빠르고 강력하며 미국이 대비할 시간도 없이 침략할 수 있는 현대식 철제 전함의 등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게 바로 대백함대라고 볼 수 있다. 루스벨트는 전함이 강력해지면서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천혜의 방어막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 펀치력을 확장하는 전략을 택했다. 고립주의에서 적극적 확장으로의 전환은 여전히 미국 외교의 기조다. 미국은 백색함대의 세계 일주 이후에도 해군력 건설에 더 힘을 쏟았다.

루스벨트의 백색함대는 세계 일주 직전에 등장한 영국의 최신 전함 드레드노트*****에 밀려 순식간에 구식 함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미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형 전함을 계속 뽑아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해군을 모두 합친 전력의 두 배, 세 배라도 미국 해군을 이겨낼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주목할 사실은 미국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가 해군력 증강을 공언하고 있다는 점. 루스벨트를 읽으면 트럼프가 보인다. 트럼프의 전투함 건조 구상이 조선 경기 활성화를 염두에 둔 것처럼 루스벨트의 대백함대 역시 1907년 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백색함대를 우습게 여긴 사람도 있다. 망해가는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은 북양함대 사열을 몸이 아프다며 거부했다. 미국 방문시에도 비가 온다는 이유로 웨스트포인트 방문을 취소하고 낮잠 자느라 약속했던 조선소 방문도 취소됐다. 이홍장은 걸핏하면 방에 틀어 박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파악하기 보다는 의전에만 신경 썼고 결국 나라의 멸망을 부추겼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거꾸로 유럽은 중남미 부실채권에 골치를 앓았다. 1890년 말에는 당시 세계 최대 은행이던 영국 베어링 브러더스가 아르헨티나 부실 채권으로 도산 위기에 몰린 적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밀농사 흉작과 정변 탓이다. ‘영국이 기침하면 세계가 감기에 걸린다’던 시절, 유럽도 얼어붙었다. 세계 공황이 우려되던 상황에서 베어링은 위기를 극복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물론 프랑스와 러시아까지 적극적으로 구제 금융에 나선 덕분이다. 모두의 공멸을 피하자는 당시는 국제 공조는 경제사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국제간 거시정책·금융공조의 뿌리가 형성된 게 이때다. 최종 대부자, 즉 은행의 은행으로서 중앙은행의 중요성이 보다 강하게 부각됐다.

** 페루와 볼리비아가 칠레와 자원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 새똥의 거대한 퇴적물인 구아노와 초석을 둘러싼 전쟁이어서 ‘새똥전쟁’으로도 불린다. 자원을 둘러싼 최초의 국제 전쟁으로 손꼽힌다. 칠레가 승리해 막대한 영토를 확보했으며 볼리비아는 이 전쟁의 결과로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지금도 대단하다. 미국-스페인전쟁(1898)이 터지자 해군 차관 자리를 던지고 의용기병대를 조직해 대령 계급장을 달고 직접 쿠바 전투에 참전한 일화가 유명하다. 역사가로도 이름을 남겼고 해군력 증강에 힘썼으며 반(反) 트러스트법으로 재벌의 독점 구조를 파타하는데 앞장섰다.

****몽둥이 정책은 부통령 시절인 1902년 루스벨트의 연설에서 처음 쓰였다. ‘평화를 위해서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연설을 마친 뒤 불과 12일 만에 암살 당한 매킨지 대통령을 승계한 루스벨트는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그 근간이 몽둥이 정책이다. 중남미에 군함을 보내 스페인과 영국, 독일의 영향을 차단하고 아프리카 2차 모로코 위기에도 전함을 보내 독일을 견제하고 프랑스 편을 들었다. 파나마 운하도 마찬가지. 루스벨트는 큰 돈을 요구하는 콜롬비아 정부를 배제하고 반란군을 지원해 파나마 공화국을 독립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으로 운하계약을 맺었다.

루스벨트의 ‘몽둥이 연설’은 원전이 ‘멀리 가려면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 루스벨트는 ‘부드러운 언행’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미국 내에서는 그렇게 안 했다. 무연탄노조의 대파업을 몽둥이(군대)를 동원해 진정하면서도 광부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용자의 양보를 이끌어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기업집중에도 몽둥이를 휘둘렀다.

***** 1906년 2월 진수된 영국 해군 전함 드레드노트(HMS Dreadnought)는 현대 전함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전투함. 두터운 장갑과 일시에 3톤의 포탄을 내뿜는 화력, 대형함 최초로 장착한 증기터빈 엔진이 내는 당대 최고의 속도 등 모든 면에서 기존 전함을 뛰어넘었다. 1척 건조에 국가 예산의 1% 가까운 금액이 들어 세금 증액 등을 불렀다. 1차세계대전 직전까지 세계 각국은 모두 110척의 드레드노트··슈퍼드레드노트급을 22척이나 찍어냈다. 펄 케네디의 명저 ‘강대국의 흥망에 따르면 전함 건조 경쟁으로 이 시기에 주요국가의 국방 예산도 두 배씩 늘어났다.

****** 1907년 3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강타한 공황. 영국과 프랑스,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국제적인 금(金) 수급 부족과 구리 광산 투기 후유증 탓에 발생했다. 당시 파국을 막은 주역은 큰손이자 은행가인 J P 모건. 미국 정부가 협조를 당부하자 모건은 돈의 홍수를 일으켜 증권사와 투신사에 자금을 대줬다. 결국 1907년 공황은 모건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며 큰 파장 없이 진정됐다. 자존심이 상한 미국 정부는 근본대책 마련에 나섰다. ‘다시는 민간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다짐의 결과물이 1913년 출범한 연방준비제도(FRS)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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