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어뢰의 경제학과 사운드 오브 뮤직





1866년12월21일, 오스트리아 정부가 영국인 사업가 로버트 화이트헤드와 어뢰 공급계약을 맺었다. 요즘 기준으로 화이트헤드 어뢰의 성능은 보잘 것 없었다. 속도라야 고작 6.5노트에 항주거리도 189m 남짓. 그래도 15년이 흐른 뒤, 유럽과 중남미 국가들도 똑 같은 어뢰를 썼다. 화이트헤드가 발명한 어뢰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가 공유하는 상업용 무기였던 셈이다. 두 가지 형태의 어뢰를 제작했던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공급가격은 한 발당 600 달러와 1,000달러.


당시 기준으로는 결코 싸지 않았으나 각국은 앞다퉈 이를 도입했다. 영국이 254발, 러시아 250발, 프랑스 218발, 독일 203발, 오스트리아 100발을 비롯해 이탈리아·그리스·덴마크·벨기에·포르투갈·아르헨티나·칠레까지 합쳐 판매량은 1,500발 이상. 19세기 후반까지 화이트헤드 어뢰는 꾸준히 개선되며 미국은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주문을 넣었다. 화이트헤드는 돈 방석에 올랐다. 개량형을 포함해 누적 판매 수량이 2,500발을 넘었으니까. 교전 국가끼리 같은 어뢰를 갖고 싸우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물론 화이트헤드 이전에도 어뢰는 있었다. ‘어뢰(Torpedo)’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진 로버트 풀턴과 권총으로 유명한 사무엘 콜트도 어뢰를 제작했지만 ‘수중에서도 터지는 폭탄’ 수준에 그쳤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북부연방 함정 36척, 남부동맹 함정 6척이 기뢰 공격으로 침몰 또는 파손됐으나 자기 추진력을 지닌 어뢰에 의한 피격은 아니었다. 하이트헤드 어뢰의 최대 특징은 자력 운행. 압축공기와 실린더 2개의 힘으로 목표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계약 후에 화이트헤드는 일정 심도에서 항주하는 장치와 자이로스코프를 달아 운동성과 명중률을 끌어올렸다.

다민족국가로서 발트해에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게 어뢰는 해군력 증강을 위한 ‘신의 한 수’에 다름 없었다. 척당 건조비용이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전함을 몇천 달러 짜리 어뢰 한 방으로 날릴 수 있다면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해군 강국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도 마찬가지. 개량형 화이트헤드 어뢰를 한 발에 2,000달러씩 수십만 달러 어치를 사들이고 면허생산 공장을 세웠다.


각국이 사들인 어뢰는 제 값을 해냈다. 러시아는 1875년 화이트헤드 어뢰 한 발로 오스만 튀르크의 전함을 격침시켰다. 국가 간 전쟁에서 최초의 어뢰 사용과 격침 기록을 세운 러시아 역시 어뢰로 고통받았다. 러일전쟁 서전에서 일본 해군은 뤼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향해 어뢰 16발을 발사해 전함 3척에 피해를 입혔다. 제정러시아가 ‘세계최강’이라며 뽐내던 발트함대가 대한해협 해전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데에도 어뢰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러시아 발트함대는 가뜩이나 오랜 항해로 지친 마당에 인도양을 지나면서부터 일본 어뢰정의 급습을 감시하느라 전 장병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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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뢰의 효용성은 갈수록 더해간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은 구형 어뢰를 제대로 활용해 아르헨티나 해군의 순양함을 격침시켜 승기를 다졌다. 반면 아르헨티나 해군의 잠수함이 영국 함대를 향해 발사한 어뢰는 불발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의 어뢰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포클랜드 전쟁의 전개와 결말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어뢰는 수천 달러였던 이전과 달리 비싸졌으나 무기로써 효율성은 여전하다. 미 해군이 운용하는 MK-48 어뢰 최신형의 가격은 한 발에 40억원을 웃돌지만 전투함의 가격도 수천억원대로 뛰었기 때문이다. 최신형 이지스함은 약 2조원, 미 해군의 최신형 줌왈트급 구축함의 가격은 4조원에 이른다.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다’는 경제성의 원리에 딱 들어맞는 무기가 바로 어뢰다.

어뢰의 시대를 활짝 연 화이트헤드는 무수한 얘깃거리도 남겼다. 둘째 딸이 독일 수상을 지낸 비스마르크의 아들과 결혼 했다. 둘은 자식을 많이 낳아 요즘 비스마르크 가문 후손 중에는 화이트헤드의 외손이 많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장남인 존 화이트헤드에게 사업체를 물려줬다.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막대한 재산은 존의 딸인 아가트(Agathe)가 대부분 물려받았다.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손녀인 아가트는 1909년 오스트리아 해군의 U-6 잠수함 건조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

아가트가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결혼한 인물이 오스트리아 해군 게오르크 폰 트랩 대위. 귀족 출신으로 중국 의화단의 반란 사건 진압에도 참전했던 폰 트랩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잠수함 함장으로 연합국 군함과 상선 11척 4만5,669톤을 격침시켰다. 화이트헤드 어뢰(발전형)를 사용하며 오스트리아해군의 에이스 잠수함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폰 트랩은 종전 후인 1922년 아내와 사별했다.

아내가 남긴 유산으로 삶은 풍족했으나 딸 다섯과 아들 둘은 둔 홀아비 폰 트랩은 사별 5년 만인 1927년 47세 나이로 사범대학 출신의 22세 견습 수녀와 재혼하고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킨 독일은 그에게 잠수함대로 복귀하라고 채근했으나 나치를 싫어해 조국을 등진 것. 폰 트랩 가족은 영국에서 투자를 잘못하는 통에 쫄딱 망했으나 바로 일어섰다. 자신은 물론 아이들과 두 번째 부인이 갖고 있는 탁월한 음악 능력을 살린 가족 합창단이 호평받은 덕분이다.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소개됐다. 1965년 개봉작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에는 어뢰와 잠수함, 사랑과 지참금, 사별 얘기가 담겨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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