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서 먹고 자고 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하루하루 피가 마를 지경입니다.”
경기도 A동물원에서 사육사로 일하고 있는 박모(40)씨는 요즘 온종일 방역작업에만 매달리고 있다. ‘자식처럼 키워온 동물들이 잘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는다. 이 동물원은 지난달 인근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의심 신고가 접수되자 곧바로 조류 관람 중단 조치를 내리면서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지난 20일 서울경제신문 기자가 찾은 A동물원 앵무새마을은 ‘AI 격리 조치’라는 안내문만 붙은 채 적막감만 감돌았다. 평소 150마리 새들이 관람객들과 어울려 활기를 띠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곧 닥칠 것 같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한산했다. 박씨는 “청정지역으로 여겨지던 서울대공원이 최근 뚫렸다는 소식에 2시간 넘게 걸리는 방역작업을 하루 두세 번에서 여섯 번으로 대폭 늘렸다”고 걱정스레 말했다. 특히 AI 감염이 의심될 경우 희귀종과 천연기념물 등 가릴 것 없이 살처분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육사들에게 큰 압박이다. 또 다른 사육사 김모(45)씨는 “하루하루 전쟁 같은 방역작전을 치르고 있다”며 “방역망이 뚫리면 자칫 희귀종과 천연기념물의 멸종도 우려해야 할 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이달 16일과 17일 서울대공원에서 연이어 폐사한 황새 두 마리는 국립환경과학원 정밀검사 결과 고병원성 AI(H5N6형)로 판명됐다. 일부에서는 황새를 복원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AI로 죽어 나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AI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전국 주요 동물원의 폐쇄도 잇따르고 있다. 용인에버랜드(조류시설)와 인천대공원, 테마동물원 쥬쥬(조류시설) 등은 지난달 말부터 문을 닫았고 이달 중순 이후에는 서울어린이대공원, 대전오월드(조류시설), 광주우치동물원, 전주동물원 등도 속속 휴장에 들어갔다. 규모가 큰 사립 동물원과 지방자치단체 등이 운영하는 공립 동물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환경부와 지자체의 관리로 나름대로 방역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달 16일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천연기념물인 황새 2마리와 원앙 5마리가 AI에 감염되자 동물원을 즉시 휴장한 것도 위기관리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소규모 사립 동물원들이다. 현행법상 사립 동물원 관리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과 관광진흥법 등 개별 법률로 분산돼 있어 소관 업무가 여러 부처로 분리돼 있다. 사실상 관리·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환경부와 지자체의 AI 방역 강화 지침 하달 외에는 대책이 없다는 얘기다. 결국 시설이 폐쇄되면 막대한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사립 동물원들은 자체 인력을 동원해 24시간 비상근무 태세를 유지하며 방역작업에 매달리는 실정이다.
인천에서 한 조류 동물원을 운영하는 한모(42)씨는 “찾는 손님이 크게 줄었는데 인건비는 계속 나가고 소독약 값만 해도 한 달에 수백만원”이라며 “10명 남짓한 사육사들이 한 달 넘게 돌아가면서 방역작업을 하다 보니 체력적 부담도 한계에 다다랐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방역을 개별 동물원 재량에 맡기게 되면 희귀종과 천연기념물을 지킬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재홍 서울대 수의과대학장은 “AI는 신속한 대응이 중요한데 개별 동물원이 임의로 사체를 처리하게 되면 처리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방역작업이 진행돼야 추가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전국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