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혈맹인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스라엘을 등지고 팔레스타인 등 아랍권이 요구해온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에 사실상 동의해 미국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엄청난 후폭풍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지난 1979년 이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이익에 반하는 움직임이 있으면 어김없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버팀목 역할을 해왔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한 달을 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37년간의 관례를 깬 외교적 결단을 내리면서 이스라엘을 충격에 빠뜨렸다.
유엔 안보리는 23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회의를 열어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웨스트뱅크)과 동예루살렘에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스라엘이 강하게 반대해온 결의안은 이날 표결에서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찬성 14표, 기권 1표로 통과됐다. 이날 결의안 채택을 결정지은 것은 미국의 기권표다. 그간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해 전통 우방인 이스라엘이 반대하는 결의안을 모두 무산시켜온 미국이 기권으로 결의안 통과를 사실상 허용한 셈이다.
안보리 결의안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령 내에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관계회복을 위해 모든 정착촌 건설활동을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회의는 당초 22일로 예정됐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이 결의안에 대해 “이스라엘에 공정하지 않다”며 미국의 거부권 행사를 주장해 한 차례 연기됐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2국가 해법’이 관철돼야 하고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은 이를 위협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결국 안보리 결의안이 채택됐다. 2국가 해법은 이스라엘 옆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의안 통과 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유엔을 향해 강력히 반발하며 “결의안을 거부하고 내용도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네타냐후 총리는 “오바마 행정부는 유엔의 집단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뒤에서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트럼프 당선인은 물론 미 의회와 공화당, 민주당 내 친구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을 따돌렸다. 2009년 오바마 집권 직후 취임한 네타냐후 총리는 수차례 정착촌 건설에 반대입장을 표해온 오바마 정부와 8년 내내 갈등을 빚어왔다. 특히 미국과 이란 간 핵협상 타결 이후 양국 관계는 한층 냉랭해졌다.
이스라엘이 로비를 벌여온 트럼프 측과 미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도 결의안 통과 직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맹공을 폈다. 트럼프 당선인은 결의안 채택 직후 “(대통령에 취임하는) 내년 1월20일 이후 유엔의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며 이스라엘 편에 섰다. 이스라엘은 차기 트럼프 정부와 우호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트럼프 당선인이 총애하는 큰딸 이방카의 남편인 유대인 재러드 쿠슈너를 통해 강력한 로비를 벌여왔다.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의장도 성명을 통해 “수치스러운 결과로 이스라엘을 고립시키는 위험한 외교적 선례를 만들어 중동 평화에 타격을 줬다”고 비판했으며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미국의 거부권 포기에 대해 “리더십과 판단력의 실패”라고 강조했다.
반면 아랍권은 안보리 결의안에 환호했다. 아메드 알리 아불게이트 아랍연맹 사무총장은 성명에서 35년이 넘는 노력 끝에 결의안이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점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사적 투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모하마드 알모마니 요르단 정보장관도 “이 역사적인 결정은 이스라엘 정착촌의 위법성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과 역사적인 땅에 살 권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합의”라고 강조했다. /뉴욕=손철 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