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공직사회는 국가운영 최후의 보루]靑 눈치보다 정책골든타임 놓쳐..."관료에 전권 주고 책임물어야"

<4>'관료 보신주의'에 멍드는 국정

靑, 일선까지 시시콜콜 개입...장관도 실무자도 '열중쉬어'

발표만 남겨둔 건보료체계 개편안 '윗선 압박'에 차일피일

기자브리핑까지 끝난 기재부 경제혁신초안 완전히 뒤집혀

"내부통제 심각...부처에 정책 추진할 수 있는 힘 실어줘야"



“예전에 청와대로부터 전화가 많이 온 날은 하루에 10통을 받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걸려오는 전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소식이 궁금해 먼저 연락해볼 정도입니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26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청와대와의 정책 조율은 거의 없어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렇다고 정부부처 차원에서 주요 정책을 소신껏 마련, 추진하지도 못하는 상태다. 일상적인 업무는 돌아가지만 논란이 되는 정책은 아예 내년 대선 이후로 미루자는 게 관가의 분위기다.


분야별 정책은 각 부서에서 책임지고 청와대는 더 큰 국가운영의 틀에서 정책들을 조율하는 게 정상이지만 현실과는 크게 다르다. 일선 부처에서 결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청와대에서 시시콜콜 개입하다 보니 장관부터 실무자까지 청와대만 바라보는 형태가 이어져 오고 있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이 대표적인 예다.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으면 가난하더라도 월 수만원의 보험료를 부과받게 되고 피부양자로 등록된 부유층은 단 한 푼의 보험료도 내지 않는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됐다. 정부도 지난 2013년 7월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기획단’을 출범시키고 소득 중심의 단일 부과체계를 골자로 한 개편안 마련을 추진했다. 기획단은 1년6개월 넘게 논의한 끝에 개편안을 마련했지만 정부는 발표를 수차례 연기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급기야 2015년 1월 개편안 발표를 하루 앞두고 돌연 발표를 취소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청와대 외압설에 대해 부인했다. 하지만 문 전 장관의 말을 믿는 건보공단 직원들은 거의 없는 분위기다. 공단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공단에 압력을 행사한 것은 복지부였지만 그게 곧 청와대의 뜻이었다”고 말했다. 부과체계를 개편하면 보험료가 오르게 되는 계층의 반발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문 전 장관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진엽 장관은 취임 후 약 1년간 ‘시뮬레이션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10월 국정감사에서 연내 개편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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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은 정부가 그나마 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나은 편이다.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 등은 반드시 필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느라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 등을 얘기하는 기사가 나가면 윗선(청와대)이 많이 싫어한다”며 “우리 입장에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정책으로 눈을 돌려보면 청와대가 아예 기획재정부가 짠 판 자체를 뒤집어엎은 사례도 있다. 2014년 2월 기재부는 경제혁신3개년계획 초안을 마련해 기자들에게 설명까지 마쳤지만 약 일주일 뒤 발표된 실제 안은 상당 부분이 수정된 것이었다. 초안에는 경제혁신 추진 핵심과제가 15개였지만 발표 당시에는 최종 9개로 줄어들었다. 기재부가 주도한 야간 달러 선물시장 개설 등의 과제는 대거 빠졌다. 2014년 초안 마련에 참여했고 그 후 3년 동안 이어져 오다 지난달 종료된 경제혁신3개년계획 관련 회의에 꾸준히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안이 바뀐 것에 대해 기재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며 “그저 청와대 쪽에서 누군가 바꿨나 보다 했다. 적어도 경제는 기재부가 컨트롤타워여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정부는 2014년 이듬해 경제정책 방향에 군인연금 개편을 포함시켰다가 청와대와 일부 정치권의 반발로 하루 만에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짠물’ 예산을 편성한 뒤 마지못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것도 청와대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정부(청와대)는 유달리 ‘나랏빚 몇 조원’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며 “정부 입장에서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예산을 짤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내년 추경이 확정되면 박근혜 정부 5년간 총 4번의 추경이 편성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관료들이 소신껏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줄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부처에 정책결정권 등 소관 업무에 대한 전권을 위임해주고 추후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일례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보건복지부 업무에 관한 한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유 전 장관은 이듬해 누구나 하기 싫어 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했던 제2차 연금개혁을 완수해냈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관료사회에도 윗선으로부터의 내부통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며 “부처가 중심을 잡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임지훈기자 jhlim@sedaily.com

임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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