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친일의 자양분, 조선토지개량령





‘전답(田畓) 정비, 자금 지원, 수리시설 확충, 양잠과 면화 증산 장려.’ 조선총독부가 1927년12월28일자 관보(官報)를 통해 공포한 조선토지개량령의 핵심 내용이다. 55개조로 이뤄진 토지개량령은 1921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연장선. 일제는 세 가지 이유에서 조선의 농업 개발을 추진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에서 원료를 구해 본국에 보내는 식민지 경제 정책이 깔려 있었다.


두 번째는 일본 내 수급 불안. 메이지 유신과 함께 농업 개혁에 나서 국내 수요를 충족하고 소량이나마 수출할 정도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1910년대 중후반부터는 인구 급증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쌀 때문에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1918년7월, 일본 도야마(富山)현의 우오조(魚津)항에서 주부 300여명이 집단 행동에 나선 것. 주부들은 경찰에 의해 바로 흩어졌지만 불씨가 일본 전역으로 번져 9월 초까지 연인원 200만명이 참여하는 ‘잇키(一揆·민중봉기)’로 커졌다. 미곡 도매상 점포 369개소가 불 탄 봉기는 찬 바람이 불며 가라앉았지만 내각 붕괴 등의 파장을 남겼다.*

식량 증산이 다급해진 일제는 조선과 타이완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에서의 산미증산계획이 성과를 못 내자 종합대책으로 나온 게 1927년의 조선토지개량령. 저리자금 융자가 포함된 토지개량령은 과도한 수리조합비 부담으로 지지부진하던 산미증식계획에 불을 붙였다. 10년을 목표로 진행된 토지개량사업은 일본 내에서 쌀 값 폭락에 따른 농업공황이 발생한 1934년 중단됐으나 외형적인 성과를 올렸다.

토지개량령이 발동된 1927년 1,885만섬이던 조선의 쌀 생산은 1935년 2,175만섬으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정점을 찍은 1937년에는 쌀 소출이 2,680만섬에 이르렀다. 일본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식민 지배가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의 농업 생산량 증가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는 동안 부쩍 목소리가 높아진 국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강조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과연 일제의 농업정책은 조선을 살찌웠을까. 그렇지 않다. 통계가 말해준다. 허수열 충남대 명예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의 책장을 넘겨 보자. 1926년 543만섬이던 대일 쌀 수출이 1938년 1,033만섬으로 늘어날 만큼 증산분 이상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저서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 따르면 조선 쌀은 일본이 해외에서 들여오는 쌀의 60~70%에 이르렀다.

쌀 생산은 늘었어도 조선 민중은 오히려 배를 곯았다. 한일병탄 직후인 1911년 0.78섬이던 조선인 1인당 연간 미곡 소비량이 1934년에는 0.37섬으로 오히려 줄어든 것도 소출 증가분 이상의 쌀을 일본에 보낸 탓이다. 반면 1인당 연간 0.7섬의 쌀을 먹던 일본인들의 미곡 소비는 1.1섬으로 늘어났다. 눈 앞의 쌀을 일본에 내준 조선인들은 만주산 잡곡으로 주린 배를 겨우 채웠다.


일본이 쌀을 강탈한 게 아니라 돈을 주고 사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 이익마저 일본인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허수열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쌀 생산 증가는 52%. 그러나 증가분의 83.4%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들이 가져갔다. 조선의 전체 농업인구 가운데 0.3%에 불과한 일본인들이 산미 증산의 과실을 독차지한 것이다. 물론 과실의 일부를 얻은 조선인 지주들도 없지 않았다. 이게 독이 됐다. 개발의 단맛을 본 조선인 지주의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를 반겼다. 일제의 ‘조선 농업 개발’이 ‘구조적 친일’이라는 민족사의 암 덩어리에 자양분으로 작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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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일제의 지주 위주 농업정책, 수리조합 운영과 1934년 이후 일본의 농업공황이 겹치며 조선인 소규모 자영농이 무너졌다. 중소 자영농이 대거 소작인으로 전락한 것. 1930년대를 거치며 소작농은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농민 분해가 바로 일제 농업정책의 결과였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일제가 중일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진 채 미국·영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쌀 수출마저 강제 공출로 바뀌고, ‘공정가격’으로 계산했다는 수매대금 마저 ‘강제저축’과 ‘체신 간이보험’으로 다시 빼앗겼다.**

조국의 해방을 못 보고 눈을 감은 대구 출신 저항 시인 이상화는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읊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중략)…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저항시인의 예지력이 언어만큼이나 예리하고 가슴을 울린다. 땀 흘려 농지를 개량했지만 ‘빼앗긴 들’에서 ‘조선인경제’는 없었다. 식민지경제만 존재했을 뿐이다. 묻고 싶다. 일본인과 소수 조선인 대주주를 위한 ‘조선경제’가 ‘조선인경제’였냐고. 조선토지개량령의 유령이 아직도 우리 주변을 맴돈다. 친일의 뿌리, 참으로 깊고 질기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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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官)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일본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이유는 물가고 탓. 한 섬(150㎏)에 10엔이라는 가격을 유지해온 쌀 값이 연초부터 오르기 시작해 6월 20엔, 7월 들어서는 30엔으로 뛰자 눌러왔던 불만이 터진 것이다. 쌀 값 급등 요인은 수요 증가와 투기. 1차 세계대전 특수에 따른 호황으로 쌀 소비는 느는 데 비해 산업화에 따라 농가 인구는 줄어 수급에 변화가 생겼다. 공산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으로 쌀값이 상승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쌀을 매점매석한 미곡상들의 투기도 물가고를 부추겼다.

찬 바람이 불며 봉기는 가라앉았지만 파장이 컸다. 연행된 연 인원만 2만5,000여명. 7,786명이 기소돼 2명 사형, 12명 무기징역, 59명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다. 사회적 파장은 더 컸다. 복구에 투입된 자금만 1,000만엔. 데라우치 내각이 사퇴하고 책임론 공방은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제 탄생을 앞당겼다. 민주주의가 반짝했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도 열렸다.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때부터다. 당국의 보도통제에 맞서 쌀 소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아사이(朝日)신문은 정론지로써 명성을 굳혔다.

**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할당된 간이 저축과 간이 보험 증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적지 않지만 한 푼도 되돌려 받을 수 없다.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대일청구권을 일괄적으로 포기한 탓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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