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차가 빈번하게 고장을 일으킨다면 십중팔구 분통 터지기 마련이다. 지난 2015년 9월에는 벤츠 승용차의 시동이 세 번이나 꺼진다고 교환 또는 환불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한 소비자가 벤츠 매장 앞에서 골프채와 야구 방망이로 차를 파손한 적도 있다. 미국이라면 이런 일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 ‘레몬법(Lemon Law)’ 덕분이다.
레몬법이 등장한 것은 1975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1월4일 법안에 서명하고 6개월 후부터 효력을 냈다. 레몬법의 정식 명칭은 맥너슨-모스 보증법(Magnuson-Moss Warranty Act). 발의자인 상원의원 워렌 맥너슨과 하원의원 존 모스의 이름을 땄다. 신제품의 결함이 반복 발견되어도 수리하지 못할 경우 동일한 신제품으로 바꿔주거나 돈을 돌려주는 게 골자다.
민주당 소속이던 두 의원의 입법 취지는 ‘사기 방지를 통한 소비자 보호와 제품 간 경쟁 촉진.’ 공산품에 품질 보증서 발급이 늘어났어도 소비자들이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 손해를 입는 사례가 속출하자 이 법을 만들었다. 서면으로 품질 보증된 공산품에서 하자가 발견되면 연방 법원에 제소할 길을 열어 놓았다. 소비자가 승소하면 환급은 물론 변호사 비용을 포함한 소송 비용은 원칙적으로 회사가 부담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모든 공산품을 적용 대상으로 삼았으나 점점 소송 품목이 좁혀졌다. 자동차로.
자동차 소비자들이 연방법인 맥너슨-모스 보증법에 기대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각주는 보다 구체적인 법률을 만들었다. 1982년 코네티컷주를 시작으로 대다수 주가 자동차 관련 보증 및 소비자 보호법을 제정했다. 주 적용대상은 반복 고장. 1년 또는 주행거리 1만2,000마일(1만9,312㎞) 미만인 차량에서 똑같은 결함이 네 번 발생하면 불량차로 간주해 제작사에 전액 환불 또는 신차 교환의 책임을 안겼다.
뉴욕과 뉴저지주는 ‘구입 후 2년 또는 주행거리 1만8,000마일’로 더 까다롭다. 브레이크나 핸들·안전벨트같이 안전과 밀접한 부품의 경우 두 번만 애프터서비스를 받아도 레몬법 적용을 요구할 수 있다. 미국 전역과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시행 중인 이 법이 레몬법으로 불리는 사연이 흥미롭다. 오렌지 같지만 달기는커녕 신맛이 나는 과일인 레몬을 겉은 멀쩡하지만 불량품인 자동차나 전기 제품에 빗대서다. 영어사전에도 레몬법으로 등재돼 있다.
미국 자동차 업계의 반대를 뚫고 제정된 레몬법은 단기적으로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품질보다 디자인을 따지는 구매 성향을 낳은 것.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살 때 레몬법을 믿고 ‘고장 가능성’을 따지기보다 가격 조건이나 외형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발 빠르게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은 일제 자동차는 미국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한국산 자동차도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런 분위기 덕을 봤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에서 팔리는 모든 자동차의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 레몬법은 애완견까지 포함하는 등 적용 대상을 넓혀가고 있어도 한국에서는 요원하기만 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고시한 ‘소비자분쟁 해결 기준’이 레몬법과 비슷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소비자 보호와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해 18대 국회부터 의원입법이 추진됐으나 한 번도 통과되지 않고 모두 폐기되고 말았다. 그나마 2017년 1호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법안이 바로 ‘한국판 레몬법’이라니 지켜볼 일이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싱가포르, 심지어 중국까지 확산되고 있는 레몬법. 한국에는 특별한 레몬법이 필요해 보인다. 기대를 가졌건만 영 잘못 뽑은듯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되물리려니 국민이 피곤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