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진내멸 지역의 촌주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룁니다 / 급벌척 직급의 이타리 라는 사람이 법에 따라 자신의 업무를 30대라 고하여 30일치 일을 하고 가버렸다고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법에 따르면 60일 치가 맞는데 제가 매우 어리석었습니다 /□성에 계신 미즉이지 대사와 하지 앞에 이렇게 아룁니다.”
때는 560년을 전후한 6세기 중반. 지금의 군수·읍장에 해당하는 지방 유력자 촌주가 7급 공무원 정도로 볼 수 있는 신라 중앙관리 12등급 대사(大舍·4두품 신분상승 한계의 최고직)에게 자신의 실책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종이가 일반화되기 전 다듬은 나무 조각에 문자를 적은 고대 사료인 ‘목간(木簡)’의 기록이다. 법(法)·대(代) 등이 적힌 것은 부역을 위해 군주 임의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관련 법에 따라 30일·60일 단위로 기간을 명시한 것으로, 당시 확립된 법흥왕이 선포한 신라 율령체계가 두루 적용됐음을 입증한다. 또 지방 촌주가 중앙 관리에게 보고하면서 ‘두려워하며 아뢴다’는 극존칭을 사용한 것은 신라 중앙정부가 가야 등 지방에 강한 통치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행정 문서양식의 존재나, 당시 신라에서 문자 사용이 일상적이었다는 사실도 확인시켰다. 특히 목간 마지막 ‘전거백지(前去白之)’ 부분은 7세기 일본 목간에서 자주 나타나는 ‘~에게 말씀드린다’는 뜻의 ‘전백(前白)’형식이 신라에서 전파됐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991년부터 시작한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 중 17차 발굴(2014~2016년)에서 출토된 23점의 목간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그 내용을 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번 발굴조사의 최대 성과는 길이 35㎝의 소나무를 4개 면으로 다듬어 내용을 적은 이른바 ‘사면목간’이다. 그간 국내에서 발견된 1,000여 점 목간 중 엄격한 문서양식을 갖춘 최고 수준의 목간으로 꼽힌다. ‘일본서기’에 561년신라가 아라(함안)에 일본 침입을 대비해 축성한 기록이 전해지므로 목간의 작성 시기는 대략 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에서는 총 2,321점의 유물이 출토됐고 그 중 목기가 1,158점, 목간은 308점이 발견됐다. 특히 목간은 계곡 중심의 동쪽 성벽 구간을 보호하기 위해 석축 밑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부엽층에서 무더기로 나왔다. 지표면 붕괴방지를 위해 나무류의 부재 등을 모으는 과정에 행정문서인 사면목간, 물품 꼬리표에 해당하는 하찰목간이 포함된 것. 오늘날로 치면 택배송장 등을 버린 쓰레기더미에서 정부 문서가 담긴 태블릿PC가 발견된 것에 빗댈 수 있다.
목간 전문가인 주보돈 경북대 교수, 윤선태 동국대 교수 등은 “6세기 중반 법흥왕의 율령반포가 어떤 내용일지 학계 의문이 남아있던 중 단양 적성비와 봉평비 등의 발굴로 구체적 내용이 드러나는 과정이라 이번 사면목간이 그 법치질서의 내용과 엄격함을 보여주고, 지명·인명을 알려주는 하찰목간은 중앙 정부가 거둔 세금이 낙동강을 따라 함안에 집결돼 전쟁을 대비했음을 보여준다”면서 “당시 백제와 신라의 첨예한 대립기에 신라는 엄격한 법치주의로 훗날 삼국통일까지 성공 요인을 마련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