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화랑가는 보통 미술시장의 비수기로 꼽힌다. 분주한 연말과 설날 등 명절이 있어 관람객의 관심 끌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원로와 중견, 이른바 스타급 작가들이 선호하는 봄·가을 성수기를 빗겨간 이 시기는 오히려 30대 젊은 작가들을 위한 틈새시장을 열어준다.
◇대형화랑이 주목한 유망주=갤러리현대·아라리오갤러리·원앤제이갤러리 등 국내 정상급 대형화랑을 비롯해 미술관과 문화재단이 마련한 젊은 작가 기획전이 얼어붙은 신년 미술계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차세대 옐로우칩이자 미래의 블루칩을 찾아낼 기회다.
긋고 긋고 또 그은 많은 선(線)의 반복이 검은 숲의 풍경을 이룬 그림은 서울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의 ‘직관의 풍경’전에 선보인 박광수(33) 작가의 ‘딥 슬립 딥’이다. 웬만한 성인 여성의 키 높이 만한 대형 캔버스에 연필·볼펜·사인펜·붓 등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변주한 그림에는 화가의 고민이 배었고, 무수한 선을 그리며 축적된 시간에는 작가의 사색이 함께 쌓였다. 박광수는 지난해 금호미술관과 두산갤러리 전시를 통해 주목받았고, 금천예술공장·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등을 거쳤으며 종근당 예술지상 등에 선정된 ‘검증받은’ 신진 작가다. 같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안지산(38)의 ‘분홍빛 얼음의 바다(The Sea of Pink Ice)’는 허름한 풍경임에도 묘한 잔상을 남기며 뇌리에 박히는 그림이다. 안 작가는 동시대 미술에서 다소 소외된 ‘회화’를 택해 전통적 기법으로 그리는 작가지만, 최첨단(?) 미술인들이 선호하는 세계적 레지던시인 라익스 아카데미 출신이다. 그가 그리는 것은 단순한 풍경과 정물이 아니라 직관과 감성이다.
미술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작가 박경근(39)은 갤러리현대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전시 오프닝을 배경으로 라이브 비디오 형식으로 영상을 촬영했다. 동시에 퍼포먼스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천국의 계단’이라는 제목으로 실시간 상영됐고 지하1층에서 전시기간 볼 수 있다. 그는 2010년 ‘청계천메들리’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여했고 지난해 삼성미술관 리움의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수상한 기대주다. 같은 전시에 참여한 이슬기(45) 작가는 ‘뼈 있는 속담’을 기하학적 추상화 풍의 세련된 이미지로 ‘번역’해 기발한 해학성을 보여준다. 그냥 그림이 아니라 2014년부터 누비장인과 협업 중인 ‘이불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경기창작센터와 쌈지스페이스레지던시에서 활동한 그는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에 오르고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명성있는 작가다.
원앤제이갤러리는 작가가 아닌 ‘신진 기획자(큐레이터)’ 지원에 초점을 맞춰 최정윤의 기획전 ‘룰즈(Rules)’를 열었다. 7명의 참여 작가는 회화 평면 위에서 실험정신을 펼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미술관·미술상은 검증처=자신의 비용으로 전시장을 빌려 작품을 선보이고 스스로도 화가라 칭할 수 있기에 미술계는 ‘등단’의 문턱이 사실상 없다. 대신 미술관과 미술재단, 대안공간 등 비영리기관이 검증처 역할을 대신한다. 종로구 우정국로 OCI미술관은 산하 창작스튜디오에서 활동한 이들을 모아 ‘입주작가전’을 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추영 학예사가 “새로운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과 개념적인 해석”의 작가로 평한 박상희,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의 이관훈 큐레이터가 “일상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경험의 에피소드를 작업으로 치환”시킨다고 본 김치신 등 9명이 참여했다. 강남구 압구정로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는 ‘제16회 송은미술대상’전이 열려 대상의 김세진을 비롯해 수상작가 염지혜·이은우·정소영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미술관과 비엔날레 등 비영리 프로젝트 전시이력과 미술상 수상은 작가의 잠재력을 측정하는 중요한 가늠자다. 최근에는 레지던시 입주 이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창동 레지던시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서울문화재단의 금천예술공장, 경기창작센터, 인천아트플랫폼 등이 주요 레지던시로 꼽힌다. 일각에서는 전시이력과 미술상, 레지던시가 작가들의 ‘스펙쌓기’가 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