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공장들과 욕실 자재 업체들로 즐비한 을지로 3가에 ‘상업화랑’이 들어섰다.
지하철 을지로3가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화려한 조명상가 간판들 사이로 흰 바탕의 검은 글씨가 무뚝뚝한 ‘상업화랑’ 상호가 눈에 띈다. 어둑한 계단을 따라 4층까지 올라가야 만나는 허름한 쪽문, 합판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칠이 벗겨진 벽면은 화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이달 초 조용히 개관해 ‘되감기’라는 제목으로 작가 옥정호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가 확성기를 입에 대고 ‘꼬끼오’를 거듭 외치는 퍼포먼스 영상작품을 정유년 새해를 여는 새벽 닭 울음으로 반기기엔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농성장에서 촬영했다는 점이 뒷덜미를 잡는다. 누가 봐도 박태환·김연아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들이 빛나는 트로피는 선반에 던져둔 채 지하철에 기대 졸고 있는 2009년작은 스포츠 스타에 대한 과대포장과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에 대해 되묻는다. 공교롭게도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진 이들이다. 말쑥한 수트 차림으로 갯벌에서 요가 자세를 연출하는 이른바 ‘뻘짓’ 연작은 2012년 삼성미술관 리움의 ‘아트스펙트럼’ 전시에서도 눈길을 끈 작품이다. 멀리뛰기의 정지 화면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사진은 실상 수없이 반복한 제자리뛰기의 장면들로, 뛰어봐야 제자리인 ‘헬조선’을 자조하는 듯하다. 우습지만 시대와 맞물려 ‘예언’같이 읽히는 작품이지만 대부분 3년 이상 된 구작이다. 최신 영상작품에서도 “‘세계의 비참’을 엉성한 흉내내기를 통한 헛된 비극과 헛된 희극의 제스처로 보여준다”는 작가의 부조리극은 계속된다.
‘상업화랑’의 경우 이름만 ‘상업’을 썼을 뿐 실제는 비영리 전시공간으로 신진기획자 양성과 신인작가 발굴, 40~50대 중진작가 재조명을 지향한다. 국내 최정상 화랑인 갤러리현대의 사외이사이고 몽인아트센터 기획실장을 거쳐 AK백화점 갤러리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양찬제 상업화랑 대표는 “작가들이 임대한 공간 일부를 가벽으로 나눠 12평만 빌려 월세는 35만원 정도고 회사일이 없는 금~일요일 오후만 문을 연다”면서 “기존 화랑도 힘든 미술시장 불경기에 적은 비용부담으로 잠재력 있는 작가·기획자를 위한 소규모 공간을 서울의 심장부, 산업화의 중심부에서 운영한다는 데 의의를 둔다”고 말했다.
한편 을지로 일대가 최근 미술 관련자들의 ‘관심 특구’로 부상하고 있다. 2~3년 전부터 작가들이 먼저 둥지를 틀었다. 양아치(본명 조성진), 김아영, 박경근 등 굵직한 미술상(賞)과 비엔날레로 이름을 알린 작가는 물론 신진작가·디자이너의 작업실과 프로젝트성 전시공간 등 50여 곳이 있다. 철공소와 인쇄공장, 자재상이 즐비한 을지로 그 자체가 재료 공급처라는 게 최대 강점이다. 특히 설치작가들이 선호한다. 삼청로·인사동 화랑가와 청담동·가로수길의 높은 땅값을 감당할 수 없는 기획자들, 차선책으로 주목했던 문래동·성수동 공장지대 작업실의 치솟는 임차료에 밀려난 작가들이 저렴하게 공간을 빌릴 수 있으면서 대중교통의 요지인 을지로로 몰려들었다. 중구청도 낙후된 지역 개발과 예술인의 수요를 접목해 작가들에게 공간을 임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