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어휘가, 언어가 없었고 그래서 관계도 없었다. (중략) 세상의 반대편에 있는 엄마를 생각하며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버텨야 하니까, 버텨야 해. (중략) 다행히도 나에게는 피아노가 있었다.’ (임현정 에세이 ‘침묵의 소리’ 中)
피아노는 구원이었다. 12세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로 건너간 소녀에게 음악은 유일한 친구였다. 건반과의 진솔한 대화는 곧 세상과 통하는 길이 되었고,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차별의 시선도 ‘실력 있는 음악가’를 향한 기대로 뒤바뀌었다. 지난 2012년 한국인 최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아이튠즈·빌보드 클래식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이름을 떨친 피아니스트 임현정(사진·31)은 “피아노는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받게 해준,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말한다. 내달 ‘침묵의 소리’를 주제로 2년 만에 고국에서 독주회를 여는 그를 만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공연은 제가 좋아하는 곡으로만 꾸민, 제 음악 인생에서 ‘군것질’ 같은 시간이 될 거예요.” 공연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얼굴에 아껴둔 간식을 먹기 직전 어린아이의 해맑음이 번졌다. 그의 말마따나 “숙제를 다 한 뒤 하자고 아껴둔 작품”으로 만드는 연주회니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건 당연했다. 이번 공연은 임현정이 자신의 지난 시간에 주는 상(賞)과 같다. 12세에 프랑스 콩피에뉴음악원에 입학해 수석 졸업한 그는 루앙국립음악원·파리국립고등음악원을 각각 조기·최연소 수석 졸업한 것은 물론 베토벤 소나타 전곡 앨범 발매로 빌보드·앙튠 클래식 차트에서 한국인 최초의 1위를 기록했다. “스무 살 때 ‘피아니스트에게 기본이 되는 레퍼토리를 모두 공부하자’고 다짐한 뒤 저에게 10년의 기한을 줬어요. 감사하게도 10년간 베토벤·쇼팽 전곡, 바흐 평균율 등 주요 레퍼토리를 공부했고, 감히 ‘내가 좋아하는 곡’으로만 꾸민 연주회를 열자는 용기를 얻었죠.” 고이 아껴둔 작품은 슈만 ‘사육제’, 브람스의 ‘8개 피아노 소품’, 라벨 ‘거울’, 프랑크의 ‘프렐류드, 코랄과 푸가’다. “슈만·브람스의 작품에 한 인간의 모든 감정이 들어가 있다면, 라벨의 ‘거울’에는 자연 그 자체의 소리가 들어가 있어 자연과 하나 되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어요. 모두 제가 연주할 때 마냥 재밌고 ‘나와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는 곡들이죠.”
공연 주제 ‘침묵의 소리’는 지난해 출간한 그의 자전 에세이 제목에서 따왔다. 공존할 수 없는 침묵과 소리. 그야말로 오묘한 조화다. “침묵은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임현정은 “연주 직전 내면의 침묵이 고귀하고 아름다워야 그다음 만들어내는 공연의 첫소리도 좋다”며 “연주가 끝난 뒤에도 2시간여에 걸친 공연이 얼마나 강렬했느냐에 따라 느끼는 침묵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연주를 마친 뒤 느끼는 순간의 정적을 두고 그는 “침묵이 소리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10년의 숙제를 마친 뒤엔 또 다른 거창한 목표 대신 ‘내려놓음’을 선택했다. 임현정은 “‘앞으로 이걸 꼭 해야 한다’는 계획은 없다. 내 앞에 다가오는 일에 충실하면 인생의 파도가 나를 잘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어 보였다. 한층 성숙해져 돌아온 그녀의 무대는 2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봄아트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