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1년 미국 반도체 제조사 인텔은 전자업계에 선전포고를 한다. 스마트폰 등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에 인텔은 AP 사업에서 사실상 발을 뺐다. 스마트폰이 처음 선보여진 2007년 이후 퀄컴과 암(ARM), 삼성전자가 AP 시장을 선점한 탓에 후발주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인텔의 사례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에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들을 추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전자업계는 인텔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대규모 전쟁을 준비 중이다. 전쟁터는 사람의 두뇌나 신경조직처럼 작동하는 신개념 반도체인 ‘인공지능칩(AI칩)’ 시장이다.
그동안 AI는 재래식 반도체칩을 두뇌로 삼아왔다. 지난해 세간을 놀라게 했던 구글의 AI ‘알파고’도 1,000여개의 재래식 반도체를 병렬 연결해 작동했다. 이때 사용된 재래식 반도체는 주로 개인용컴퓨터(PC) 등에 사용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다. CPU가 인체의 활동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의 대뇌와 같다면 GPU는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소뇌에 비유된다. CPU는 정보처리 속도는 빠르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제한적이다. GPU는 상대적으로 정보처리 속도는 느리지만 한 번에 매우 많은 수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전자업계는 CPU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원래는 PC에서 동영상이나 그림·사진 등을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되던 GPU를 AI용으로 활용하는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CPU와 GPU를 섞어 사용하는 방식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우선 과도한 전기를 쓴다는 점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일반 PC용 GPU만 해도 칩 한 개당 소모전력이 보통 30~40W이고 이 칩을 꽂은 보드(전자부품들이 장착된 기판)는 100W 이상의 전력을 소모하는데 AI용 GPU는 더 고성능을 내야 해 훨씬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며 “스마트폰 등 소형기기에 탑재해도 칩당 소모전력을 10W 미만으로 낮춰야 하는데 GPU나 CPU로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알파고만 해도 메인서버가 어지간한 건물 1~2층 크기를 차지하는 등 공간 문제도 있다. 1,000개가 넘는 칩들을 연결하고 이를 지원하는 각종 회로와 전원을 구성해야 하는 탓이다.
이에 따라 전자업계는 재래식 칩과 별도로 AI용 작업만을 전담하는 반도체 개발에 나서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AP칩 시장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인텔이다. 인텔은 2015년과 2016년 잇따라 AI칩 개발업체인 알테라와 너바나를 각각 167억 달러(19조4,889억원), 3억5,000만 달러(약 4,084억원)에 사들여 원천기술과 개발인력 확보에 나섰다. 인텔은 ‘너바나’라는 브랜드의 AI칩을 연내에 상용화해 데이터센터 등의 AI 서버 등에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인텔의 복수혈전에 맞설 경쟁사들도 만만치 않다. 세계 GPU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한 미국 기업 엔비디아도 지난해 4월 ‘P100’이라는 명칭의 AI칩 개발을 선언했다. ‘P100’ 칩은 아직 본격적인 AI칩이라기보다는 AI용으로 재설한 GPU에 가깝지만 이 회사는 AI칩 연구개발(R&D)에 이미 20억달러(2조3,340억원) 이상을 투자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공세를 펴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9월 자율주행차에 사용할 인공지능용 칩 ‘자비에’도 공개했는데 오는 2020년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비(非)반도체업종의 기업들도 업역의 경계를 허물고 AI칩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미국 컴퓨터 제조사 IBM이 ‘트루 노스(True North)’라는 브랜드로, 인터넷서비스 업체 구글은 ‘TPU’라는 브랜드로 각각 AI칩 개발을 공식화한 상태다.
국내 기업들의 AI칩 개발은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영국의 신생기업(스타트업)인 그래프코어에 지분투자자로 참여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대규모 기술투자나 기업 인수 사례가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AI칩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산업 잠재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시장성이 확실하지 않다”며 신중론을 폈다. 하지만 AI 기술을 연구 중인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인텔도 자신들이 장악했던 CPU 시장에 안주했다가 AP 시대가 도래하자 주도권을 상실했는데 국내 반도체 제조사들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2020년까지 256코어의 토종 AI칩 개발 및 상용화에 나서기로 하고 관련 R&D 사업 공고를 이르면 2월 초 내려는 것도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다. 인텔 등 해외 업체들은 주로 대형 서버 설비 등에 들어가는 AI칩 개발에 주안점을 둔 반면 토종 AI칩은 스마트폰, 웨어러블(착용형 이동통신기기), 사물인터넷(IoT)기기 등에도 쓰일 수 있는 초경량·초절전 제품을 목표로 삼고 있어 훨씬 더 높은 시장성이 기대되고 있다. 한 AI 전문가는 “국제기술표준 동향과 발을 맞추고 민관 공조를 통해 시장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