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권력 공백이 몰고 온 경기 충격이 과거 정국불안 때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헌법재판소의 박 대통령 탄핵 인용 여부가 여전히 안갯속인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점증하고 있는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보폭이 빨라지는 등 외부 충격이 가세하면 경기 위축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 한은의 지적이다.
31일 한은은 ‘1월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를 통해 지난 1990년 이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대선, 탄핵정국, 광우병 파동 등 과거 정국불안이 확대된 8차례 시기를 분석한 결과 1~2개 분기에 걸쳐 고용 및 산업활동이 위축됐지만 3개 분기 이후부터 점차 회복되는 패턴을 보였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수서 택지 비리 사건(1990년 10월~1991년 3월) △14대 대선(1992년 9~12월) △김영삼 대통령 친인척 비리 사건(1997년 6~12월) △김대중 대통령 친인척 비리 및 16대 대선(2002년 6~12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통과 및 기각(2004년 3~5월) △17대 대선(2007년 10~12월) △광우병 파동(2008년 4~6월) △18대 대선(2012년 8~12월) 등 8개의 과거 사례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한은은 8차례 정국불안 시기의 경기지표를 분석한 결과 통상 3개 분기 이후에는 주요 지표가 살아나는 경향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들 시기에 평균 6.5%(이하 전년 동기 대비 기준)였던 제조업 생산 증가율은 2개 분기 뒤 4.0%까지 떨어졌다가 3개 분기 이후 5.2%로 반등했다. 4개 분기가 지난 후에는 6.9%로 종전 수준을 회복했다.
민간소비와 투자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였다. 정국불안 시기에 평균 5.0%였던 민간소비 증가율은 이후 3.5%까지 급감했지만 3개 분기를 지나고는 반등했다. 기업 설비투자도 같은 기간 5.6%에서 1.3%로 급감했지만 3개 분기 후 반등에 성공한 뒤 4개 분기를 지나서는 종전 수준을 넘는 6.5%로 회복했다. 고용도 2개 분기의 위축 기간을 거친 뒤 3개 분기에는 반등하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정국발(發) 충격은 과거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고 한은은 분석했다. 구조조정 지연 등으로 경제 체력이 떨어진데다 트럼프발 충격도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5%에 그친다. 설비투자는 기저효과로 올 상반기 3%로 반등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하반기에는 다시 2%로 꺾인다. 지난해 정부의 각종 소비진작책으로 간신히 끌어올린 민간소비는 올해 1%대 성장에 그칠 예정이며 이미 지난해 4·4분기 1.5%로 6분기 만에 1%대로 내려앉은 상태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은 빠른 잠재성장률 하락, 인구 고령화, 서비스업과 노동시장의 낮은 생산성 등으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이 장기 저성장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나마 수출 증가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올해 경기회복을 이끌어줘야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발목을 잡을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의 금리 인상, 하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등 산재한 외부충격이 더해지면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위기까지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은 관계자는 “앞으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속하는 가운데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강화, 미 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 등의 리스크 요인이 현재화할 경우 경제심리 및 실물경기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