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이 집들이 조선시대 전통한옥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북촌 한옥마을은 1930년대에 조성된 곳이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 이 곳을 만들었다. 경상남도 고성이 고향인 그는 경성(당시 서울의 명칭)로 올라와 지금의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업자)’를 하면서 개량한옥을 대량으로 지었다. 1920년대부터 익선동을 시작으로 가회동, 삼청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서울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했다. ‘건축왕’이라고 불리며 한창 때는 연간 300채의 한옥을 지었다고 한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쓴 신간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는 정세권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정세권은 그의 뚜렷한 역사적 족적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때 ‘집 장사’라는 오해를 받았다. 광복 후 개발시대에 접어들면서 한옥이 홀대받으면서 그의 업적도 무시됐다. 또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에서 함께 일했던 인사들이 납북되거나 월북하면서 과거 반공·친일정권의 배제대상이었다.
1920년대 경성의 조선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권을 침탈한 일본인들이 기존 거주지인 남쪽에서 청계천을 넘어 북쪽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북촌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와 함께 지방민들의 상경으로 경성에는 주택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농토를 잃은 지방민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하고 중소형 한옥을 건설한다. 기존의 한옥은 ‘대저택’이어서 시대적 상황과 맞지 않았다. 정세권은 대규모 필지를 잘게 쪼개 개량한옥을 만들었다. 규모는 40평 내외의 한옥이 다닥다닥 붙은 한옥밀집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한옥만 지었다. 당시 조선인(한국인)의 집이라면 기와집 한옥 이외에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당연히 안되고, 일본식 주택이나 이른바 서양식 문화주택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세권이 현대 주거문화에 끼친 영향은 더 크다. 그는 당시인들이 생각하기로 ‘쪼그만’ 한옥에서 살기 위해 최적의 구조를 생각해냈다. 기존의 대형 한옥이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들어선 ‘중정식’이라면 그는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들이 모여 둘러싸는 ‘중당식’을 구현했다. 지금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집 구조 그대로다.
정세권은 업적은 부동산 개발뿐만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민족자본가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운동을 이끌고 후원했다. 당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민세 안재홍과 고루 이극로다. 아쉽게도 이극로는 해방 직후 월북해 북한에서 활동했고 안재홍은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된다.
일제강점기 ‘경성 3왕’이 있었다. 유통왕·광산왕·건축왕으로, 유통왕은 당대 최고 갑부로 꼽힌 박흥식이며 광산왕은 최창학이다. 박흥식과 최창학은 친일부역자다. 하지만 정세권이 이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대가는 혹독했다. 일제는 정세권의 재산을 빼앗고 개발사업은 불허했다. 이후 정세권의 회사인 건양사는 쇠락의 길에 들었다.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