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금리 상승이 예상되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와 기업들이 해외 채권 발행을 대거 늘리고 있다. 채권 금리가 오르기(가격 하락) 전에 필요한 자금을 싼 값에 미리 빌려 놓기 위해서다. 트럼프 당선 이후의 달러화 강세 현상도 달러화로 표시되는 채권 발행 붐을 유발한 요인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달 1~ 27일 아태지역 국가의 정부와 기업이 해외에서 발행한 국채와 회사채 규모는 사상 최고인 660억 달러어치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12월의 2배, 지난해 1월에 비해서도 70% 가량 많은 수치다. 해외 채권은 통상 달러, 유로, 엔화로 발행되는데, 대부분은 달러 표시 채권이다. 인도 광산기업 벤단타(10억 달러), 일본의 거대은행 스미토모 미쓰이(35억 달러), 오스트레일리아 4대 은행(86억 달러) 등이 이 기간 채권을 발행해 달러화를 조달한 대표적 기업들이다. 한국, 일본, 대만의 생명보험사들도 달러 표시 채권 발행 행렬에 동참했다.
WSJ는 아태 지역 국가와 기업이 글로벌 투자자와의 접촉을 늘리고 있다며 달러 표시 채권 발행 붐은 다음 달까지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달러 자금을 필요로 하는 아태 지역 국가와 기업들이 트럼프 취임 이후 금리가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채권 발행을 서두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시장은 트럼프 취임이 올해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 첫 번째 대형 이벤트라고 보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Brexit) 협상 개시, 극우세력의 약진이 두드러진 프랑스 대선과 독일 총선 등의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판도를 바꿀 대형 정치적 이벤트가 발생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돈을 모아놓자는 전략을 구사했다는 얘기다. 시티그룹 홍콩 사무소 채권 담당 책임자인 이스웨리 크리쉬난은 “올해 1월만큼 바쁜 때는 과거에 없었다”며 “불확실성의 시대를 앞두고 자금 수요가 대거 몰렸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권에서 달러화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채권 발행이 늘어나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 달러 표시 채권 발행자의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이 증가하지만, 향후 추가적인 강 달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달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것이다.
달러화 가치는 ‘비둘기’서 매‘로 돌아선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연준)의 금리 인상 기대감과 트럼프의 당선이 맞물리면서 최근 14년래 최고치로 치솟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홍콩 사무소의 채권 담당 책임자 데베시 아쉬라는 “통화가치 변동은 달러화를 선호하는 채권발행자의 전략을 바꾸지는 못한다”며 “다만 달러 가치의 추가 상승은 향후 이들이 감내해야 할 일종의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금융규제 강화도 달러 표시 채권 발행 붐에 일조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부동산 버블을 막기 위해 역내 채권 발행을 옥죄면서 중국 부동산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부동산개발업체 아오위안그룹이 대표적 사례다. 아오위안은 최근 2억5,000만달러어치의 달러 표시 채권을 6.35%의 금리로 발행했다. 이 회사는 과거 11.25%의 고금리로 발행한 3억 달러 어치의 채권을 이번에 조달한 달러 자금으로 상환할 계획이다. 고금리 채무를 저금리 채무로 전환해 이자상환 부담을 완화한 셈이다. 재키 찬 아오위안그룹 부회장은 “최근 금리가 다소 올랐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고 채권발행 배경을 설명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중국 기업이 해외에서 발행한 채권규모는 12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가량 늘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