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매출 3조원가량을 예상하고 있는 국내 정유사의 한 자회사는 최근 원화가치가 급등하자 환율을 달러당 1,100원으로 가정해 실적 전망치를 재산출했다. 지난해 말 사업계획을 짜면서 예상했던 1,150원 선보다 기준선을 더 내린 것이다. 유화업계는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환율이 떨어지면(원화값 강세)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떨어지는 부정적 효과가 나타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환율 1,100원 선이 무너지면 수출기업에는 그야말로 재앙이 벌어진다”고 우려했다.
국내 대기업들이 롤러코스터를 탄 환율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말만 해도 강달러 전망 속에 올해 환율이 달러당 1,300원을 넘길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으나 불과 한 달여 만에 1,100원 선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급락한 탓이다.
원화값이 강세를 보이면 기업들이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제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낮아져 매출이 줄고 원화 환산 이익도 감소해 영업익까지 떨어지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특히 미국 기업들과 정면 승부해야 하는 반도체·자동차 업종의 타격이 크다.
7일 재계와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의 경우 환율이 달러당 100원 하락하면 영업이익의 5~6%가량 축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이 예상하는 올 1·4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8조원 안팎임을 감안하면 환율이 지난해 말보다 100원 낮아진다고 가정할 경우 4,000억~5,000억원가량을 손해 보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4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상승해 부품 사업을 중심으로 전 분기 대비 약 3,000억원의 환율 효과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힌 바 있는데 올 1·4분기에는 이런 플러스 효과가 마이너스로 역전되는 셈이다.
현대·기아차에도 이런 셈법을 적용하면 올 1·4분기에만 약 1,500억원가량의 손해가 난다고 추산할 수 있다. 자동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환율이 달러당 1,000원 선 아래까지 떨어지면 국내 생산 차량은 사실상 경쟁력을 잃는 지경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현대·기아차는 전체 자동차 생산물량의 40%가량을 국내에서 조립하고 있다.
반면 포스코와 SK이노베이션 등 철강·유화업계는 상대적으로 환율에 따른 이익 축소 폭이 100원당 2~3% 선으로 전자·자동차 업종에 비해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영업익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올해 환율의 방향성을 도무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삼성경제연구소와 같은 국내 대기업 싱크탱크들은 올해 미국이 2~3차례 기준금리를 올리고 이에 따라 달러가 강세를 보인다는 전제로 경영환경을 전망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기존 ‘판세’ 분석이 무의미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일단 외환 모니터링을 강화하면서 시나리오별 경영 계획을 가다듬는 선에서 대응에 나서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환율 급변동에 따라 모니터링 단계를 ‘주의’ 등급으로 올렸다. 이 회사는 지난해부터 환율 상황을 ‘안정-주의-경계-위기’ 4단계로 분류해 모니터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외화관리위원회’를 설치해 환노출 모니터링을 상시화하고 있으며 현대차는 최근 서울 본사와 미국·중국 등 해외법인 사이에 환율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채널을 구축했다.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주요 기업들은 달러당 1,100원 이하로 환율이 떨어지는 시나리오도 가정해 영향을 최소화하고 있다”며 “연초 수익 목표를 짤 때 환율 전망을 보수적으로 잡는 게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재계 일각에서는 원·달러 환율 하락세가 이어지더라도 국내 기업들이 치명적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주요 국가 환율 중에 원화만 강세를 보인다면 수출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최근 통화 강세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종(異種) 통화 대비 원·달러 환율은 중국·일본 등 경쟁 국가와 비교해 안정적인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게 기업 재무담당자들의 설명이다. 재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환율조작국으로 어느 나라를 지정하느냐에 따라 올해 기업 실적이 갈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서일범·이종혁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