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실종 사태의 원인을 ‘샤이(shy) 우파’로 돌리는 시각도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숨은 지지층처럼 자신의 정치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여전히 보수를 지지하는 세력은 강고하게 버티고 있다는 주장이다.
◇촛불혁명에 사라진 보수층=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보수·여당 성향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은 여론조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최순실 사태 직전만 해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 지지율은 30%를 웃돌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분당한 바른정당까지 합쳐야 20%를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대신 지지정당이 없거나 모른다는 무당층이 5~10%포인트 늘어났다. 상당수 보수층 지지자가 정치적 성향을 감추고 지지 정당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해석이다.
여론조사 응답률도 10%대에서 5% 수준으로 급감했는데 이것 역시 보수층이 여론조사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은 8일 “국민들이 보수정권에 너무 큰 실망을 했기 때문에 여론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다”며 “여론조사를 하면 응답률이 한 5% 나오는데 그 5%도 보수층은 아예 대답을 안 한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여론조사에서 잡히지 않는 샤이 우파를 넘어 현 상황 자체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셰임(shame) 우파’들이 자신의 정치성향을 숨기고 있다는 설명이다.
◇텃밭 TK에서 허우적대는 보수=보수의 텃밭인 대구경북(TK) 유권자들마저 보수세력을 외면하면서 우파의 붕괴를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문재인·안희정 등 야권 주자들이 이미 호남과 충청의 지역 기반을 확보했고 최근 들어서는 부산울산경남(PK)에서의 야권 지지도 갈수록 늘고 있다. TK마저 야권의 손을 들어줄 경우 차기 대선 패배를 넘어 보수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역별 대선주자 지지도를 보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TK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 보수의 심장인 TK에서 최근 그나마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급등해 2위를 기록했을 뿐 정작 대구에 지역구를 둔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한자릿수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보수 주자가 진보 주자에게 밀려 존재감도 나타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 때 쌓인 ‘TK홀대론’과 탄핵 정국으로 조성된 보수의 무기력함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평가한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는 “문 전 대표가 TK에서도 1위로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TK홀대론은 신공항 건설 철회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부지 선정 논란이 박근혜 정부 3·4년차에 한꺼번에 터지면서 폭발했다. 당시 해당 지역에서는 새누리당 탈당이 줄을 잇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촛불로 타오른 시민들의 분노에 보수 지지세력이 자취를 감췄지만 언제든 재집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여전히 친박(친박근혜)계가 중심인 새누리당도 이런 생각으로 반등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탄핵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기각을 요구하고 태극기 집회로 대변되는 우파의 활동을 지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황 대행에게 집중되고 있는 지지율 역시 보수층 결집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김광수·류호기자 brigh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