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는 ‘박연폭포’가, 단원은 ‘죽하맹호도’가 숱한 걸작들 중에서도 으뜸이죠.”
누구나 전성기가 있다. 명작을 두루 남긴 거장도 유난히 돋보이는 절정의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말 정년퇴임 한 미술사학자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18세기 조선부터 20세기 근대한국까지 아우르며 ‘한국미술사의 절정’을 되짚었고 그 작품들만을 모은 전시가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기획자인 이 교수는 백자 달항아리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의 작품을 “민족의 자존감으로 내세울 조선미”로 꼽았고 이중섭·박수근·김환기를 “조선미를 토대로 삼은 20세기의 한국미”로 분류했다.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는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와 더불어 우리 땅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 폭포의 우렁찬 소리까지 수묵으로 과장해 표현한 것이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한다. 친근한 풍속화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는 영·정조 시대의 어진(御眞) 화가로 최고의 묘사력을 자랑한다. 털이 가닥가닥 살아있고 샛노란 눈빛이 번뜩이는 단원의 ‘죽하맹호도’의 상단 오른편에는 ‘진짜 호랑이가 자괴감을 갖게 한다’는 화평이 적혀있을 정도로 사실감이 넘친다. 이 교수는 “겸재가 마음으로 본 것을 그렸다면 단원은 눈으로 본 것을 가장 잘 그려낸 화가”였다면서 “더불어 조선 후기 백자달항아리는 그 천연스러운 형태감과 무늬 없는 담백한 백색으로 한국미술사의 큰 자랑거리”라고 설명했다.
이중섭의 작품은 아이들을 그린 은지화와 유화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가 전시장에 걸렸다. 한국전쟁 시기에 은지화를 그릴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처지는 한없이 추웠을테지만 그림은 봄냄새를 풍기며 천국을 보여준다. 박수근의 유화 ‘산동네’ ‘독서하는 소녀’ ‘초가집’ 등은 잊혀진 고향을 일깨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작품은 우리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그득한 ‘산월’과 1960년대의 ‘무제’, 1970년대 점화들이 선보였다. 푸른 바탕에 더 푸른 달을 그린 ‘산월’은 정월 보름달 같고, 진녹색 바탕 위에 푸르고 붉은 점을 띄엄띄엄 찍은 ‘무제’는 봄 매화가 피어난 듯하다. 김환기가 타계하던 1974년에 그린 말년작 전면 점화에서는 절정에 오른 작가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국공립 미술관이나 박물관 소장품이 아닌, 개인 소장작 16점을 어렵게 모은 전시로 28일까지 계속된다. (02)732-3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