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리는 반도체 시황 전망에 중국의 급부상까지 겹쳐 한국 반도체 산업이 안갯속에 빠진 가운데 정치권이 또다시 발목을 잡고 있다. 정치권이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기업 때리기’에 나서면서 간섭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것.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사실상 마무리 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 백혈병 피해를 주제로 청문회를 열기로 하고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증인으로 출석하라고 요구했다.
최근 국회 환노위는 야당 단독으로 오는 28일 삼성전자 청문회를 열기로 의결했다. 청문회에서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노동자 백혈병 관련 사과·보상 내역과 자료제출 문제를 다룰 전망이다. 특히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삼성전자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 요청을 거부했다는 부분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감 이후 삼성전자는 영업비밀과 관련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첨단 핵심기술과 관련된 자료 외에는 모두 공개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영업비밀 제정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을 수용해 옴부즈만위원회를 통해 관련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를 준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이번 청문회에서는 이미 해결을 약속한 문제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따져 묻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정치권에서는 반(反)기업정서에 편승해 기업 때리기가 이어지는 모습이다.
반도체 백혈병 문제는 해외에서 수십 년 동안 추적조사를 벌이고 SK하이닉스 검증위원회 역시 1년간에 걸친 역학조사를 펼쳤지만 작업환경과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5년 7월 조정위원회가 권고안을 내놓은 이후 삼성전자는 1,000억 원을 출연해 120명에게 보상을 실시했다. 아울러 조정위원회가 제안한 독립적 전문기구인 옴부즈만위원회가 구성,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나서면서 이 문제는 사실상 해결됐다는 것이 사회적 인식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특검 조사와 미래전략실 해체 계획 등으로 삼성그룹 전체가 뒤숭숭한 가운데 권오현 부회장이 반도체 뿐 아니라 삼성전자 전반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권 부회장이 환노위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되면서 삼성의 부담은 가중될 게 뻔하다. 삼성전자 DS부문도 청문회 준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업계 한 관계자는 “대표이사가 국회에 증인으로 나가게 되면 거의 전적으로 그 준비에 몰두할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사업 관련 의사결정들은 미뤄지는 등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 산업은 최근 ‘슈퍼사이클’ 기대감과 공급과잉 우려가 교차하면서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치솟으면서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슈퍼사이클’을 맞았다는 관측이 중론이었지만 최근 글로벌 투자은행인 UBS가 2018년부터 반도체 공급 과잉이 본격화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반도체 시장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UBS는 현재의 호황 국면은 일시적인 ‘재고 조정기’로 하반기에 조정이 마무리되면 공급 과잉 구도로 바뀔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중국이 앞으로 10년간 1조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반도체 굴기’에 나서면서 한국 반도체를 맹추격할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산업계가 경쟁력 우위를 지키던 분야가 하나씩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반도체 산업이 핵심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 와중에 정치권의 흔들기로 그마저도 중국에 빼앗기는 시기가 앞당겨지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