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보험에 비해 금융투자 업계가 불합리한 대접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vs “운동장이 기울어진 게 아니라 다른 운동장이다.”
‘은행권 맏형’인 하영구 은행연합회장과 ‘검투사’로 불리는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정면 충돌했다. 은행업과 증권업 간 ‘밥그릇’을 놓고서다. 은행업계는 증권사들이 하는 신탁·투자업무를 취급하게 해달라는 것이고 증권업은 은행이 하는 지급결제나 환전업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한번 빗장이 벗겨지면 영역 간 고유업무가 완전히 붕괴되는 무한경쟁 시대를 촉발하고 한쪽이 완전히 먹힐 수 있다는 위기감이 두 사람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이번 싸움의 발단은 황 회장이 지난 6일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은행ㆍ보험에 비해 금융투자 업계가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고 밝힌 데서 본격 시작됐다. 지난해에도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증권사 법인결제 허용을 놓고 황 회장이 수시로 ‘도발’했지만 하 회장이 ‘반응’하지 않으면서 수면 위로 부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 회장이 20일 황 회장의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정면 반박하면서 삽시간에 두 업계 간 자존심을 건 혈투가 됐다. 하 회장은 이날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는 은행·증권·보험이 각각 다른 운동장에서 놀라는 전업주의를 택하고 있다”며 “운동장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운동장이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황 회장이 올해 증권사 법인지급결제 허용 등 증권업 규제를 개선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고 주장한 데 대한 반박이다.
하 회장은 또 황 회장이 증권사 법인지급결제 허용을 요구한 데 대해서도 “농구장에서 농구를 해야 하는 팀이 축구도 하겠다면서 손을 잘 쓰니 축구 할 때 손을 쓰겠다고 하는 논리와 같다”며 황 회장의 ‘기울어진 운동장’ 주장을 직접 공격한 것이다. 하 회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연합(EU)에서는 증권사가 지급결제망에 가입한 곳이 없다”면서 “기업자본에 대해 지급결제를 허용해주면 증권이 은행업이 영위하는 리스크를 안게 되고 결국 은행·산업분리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고 각을 세웠다. “증권업에 지급결제를 허용해주면 역풍이 우려된다”고도 했다. 증권사 25곳은 2009년 4월 금융결제원에 참가금 3,375억원을 내고 지급결제망에 참여했지만 개인에 대한 지급결제만 허용되고 법인결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 금융투자협회가 지적한 은행산업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도 하 회장은 “증권업권이 은행의 수익성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를 두고 두 사람이 이미 감정이 틀어질 대로 틀어져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 회장은 나아가 증권사들이 반대해온 은행의 불특정금전신탁 부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역공에도 나섰다. 하 회장이 불특정금전신탁 부활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은행의 보다 적극적인 신탁사업을 통해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확대하는 동시에 은행의 투자영역도 넓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증권업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
두 협회장 간 대결이 흥미를 끄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대표적인 스타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라는 점이다. 하 회장은 48세에 한미은행장으로 선임돼 ‘최연소 은행장’ 기록을 세운 동시에 14년 재임 최장기 은행장 타이틀을 갖고 있다. 황 회장도 삼성증권 대표, 우리·KB국민은행장 등 굵직굵직한 금융기관장을 지냈고 2001년 삼성증권 CEO 재임 시절에는 수수료 경쟁을 포기하고 투자증권으로의 탈바꿈을 시도하는 등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성을 자랑해왔다. 당시 황 회장은 “CEO는 검투사다. 지면 죽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서울대 무역학과로 1년 선후배 사이로 친분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 회장은 71학번이고 하 회장은 72학번이다.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은 2014년 KB금융지주 회장 경선 당시에도 맞붙은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낙마는 했지만 하 회장은 외부 인물 중 유일하게 최종 4파전 압축명단(쇼트리스트)에 들 정도로 막판까지 윤종규 현 KB지주 회장과 경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혈투의 포문을 먼저 연 것은 황 회장이었지만 싸움을 키운 것은 하 회장이다.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 ‘운동장 대첩’에서 누가 웃을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