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11월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외국계 기업의 한국 산업 잠식만을 낳았다’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보고서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기본적인 ‘팩트’마저 거짓이었지만 이를 신호탄으로 재계는 1년 가까이 대대적인 적합업종 때리기에 나섰다. 소위 신자유주의 논객들은 연일 언론매체에 ‘경제민주화 망국론’을 설파했다.
대표적인 주장이 ‘외국 기업들의 재생타이어·LED조명시장 잠식’이었다. 2011년 재생타이어를 적합업종으로 묶자 외국기업인 미쉐린과 브리지스톤 두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1년 만에 15%까지 올라갔다는 것. 하지만 2012년 미쉐린의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1% 미만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브리지스톤은 재생타이어의 원료인 트레드만을 국내 기업에 공급할 뿐 완제품을 팔지 않았다. 미국 스쿨버스용 재생타이어를 수출하던 대호산업 등 5개 중소기업이 2012년 전체 시장의 88.8%를 차지하고 있었다. 적합업종 지정에도 대기업인 한국·금호타이어의 점유율은 2010년 8.9%에서 2012년 10.3%로 상승세였다.
이 같은 허위 주장의 진원지였던 전경련은 본지 보도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2013년 12월4일자 16면 참조). 대신 한 임원은 필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청와대와 얘기 끝났다. 왜 아직도 중소기업 적합업종·경제민주화를 옹호하는가? (당신은) 정무적 감각이 없는 것 같다.”
동반성장 등을 휴지통에 넣고 ‘경제 활성화’로 바꾸기로 청와대와 입을 맞췄는데, 왜 생뚱맞게 아직도 경제민주화를 말하느냐는 빈축이었다. 이후 전경련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손발이 돼 극우단체 집회에 자금을 지원하고, 대기업 돈 800억원을 미르·K스포츠재단에 퍼 나르는 역할을 했다. 경제민주화를 잠재우고 친(親)대기업 경제활성화 선물을 받은 전경련다운 처신이다.
최근 보이는 전경련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그래서 어이가 없다. 최순실 국정농단 과정에서 이익단체답게 기민하게 잇속을 챙겼으면서 “권력자의 지시였다”고 변명하는 모습은 동정심을 사기 힘들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경제민주화가 대·중견기업에는 밥그릇을 더 키우지 못하게 한 또 다른 규제임에 틀림없다. 또 경제민주화가 중소업계와 한국 경제에 무조건 긍정적 효과만을 가져왔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뼈아픈 점은 경제민주화 찬반 입장을 떠나 최순실과 전경련이 결탁하는 동안 합리적인 경제민주화 논의와 반(反)시장 불공정행위에 대한 개선 노력이 실종됐다는 사실이다. 대통령-비선실세-전경련이 사익을 우리 미래와 바꿔 먹는 동안,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 심화를 고치려는 한국 사회의 절박함은 철저히 무시됐다.
박 대통령은 KD코퍼레이션이 현대자동차에 11억원어치 흡착재를 납품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을 놓고 “유망 중소기업을 지원했다”고 강변했다. 지난 4년간 전경련을 앞세워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민원을 해결해주는 동시에 동반성장을 외면해놓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억지 주장보다 더 답답한 것은 7년 전 시작된 한국의 동반성장,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된 검증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공동체의 새로운 시도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를 버리고 공을 취하는 컨센서스의 과정이 증발된 것만큼 큰 손실은 없지 않을까.
작금 ‘벚꽃 대선’을 앞두고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 의견과 법안 발의가 쏟아지고 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숙고의 시간을 갖지 못한 반작용이다. ‘팩트’에 근거한 경제민주화 피드백을 쌓아왔다면 우리 국민들은 지금쯤 더 똑똑하고 슬기롭게 독과 약을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sk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