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27일 오후7시33분, 중국 상하이 금강대반점. 당초 예정 시간인 오후 5시보다 훨씬 늦게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나타났다. 2차 대전 이후 지속된 냉전 체제의 일부를 붕괴시킨 미·중 상하이 공동선언이 발표된 순간이다. 미국과 중공(中共)은 견해가 엇갈리는 부문에 대한 입장을 먼저 적시하고 합의 사항을 밝혔다. 공동선언의 핵심은 ‘중공이 중국을 대표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점. 대만 주둔 미군과 군사시설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키다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
미묘한 문구 차이가 있었어도 미국과 중국은 상하이 공동선언으로 중공 정권 수립 이후 24년간 이어온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리고 싸웠으며 베트남 전쟁과 제3세계 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던 두 나라는 어떤 경로로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을까. 미국의 노력이 컸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뒤 8일 동안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한 차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여섯 차례 회담한 끝에 공동성명이 나왔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한 국가를 일주일 이상 공식 방문한 사실 자체가 전례 없던 일이다.
미국은 회담 성립 이전부터 공을 들였다. 냉전 초기 미·중 간 유일한 대화 창구였던 바르샤바 채널(폴란드 주재 양국 대사급 회담)을 1969년 복원, 수차례 사전 대화를 나눴다. 미국은 파리, 루마니아, 파키스탄 등지에도 중국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 의사를 확인한 끝에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결정했다. 닉슨의 안보 특별보좌관인 헨리 키신저 박사는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두 차례 중국을 방문, 정상회담의 윤곽을 그렸다. 키신저의 접촉 결과, 미국은 두 나라의 현안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현안을 토의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미국이 중국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과 경제난 때문이다. 미국은 끝없이 돈이 들어가는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발을 빼는 데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소련에 대한 포위망에 중국을 끌어들이고도 싶었다. 중국 역시 두 가지 안보 목적에 미국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터. 무엇보다 대 소련 견제가 필요했다. 1969년 3월 초 우수리강 전바오섬(珍寶島)에서 소련과 대규모 국경 충돌로 전면전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중국은 ‘적(敵)의 적’인 미국과 만났다.
중국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도 극도로 꺼렸다. 서울대 김남수·신욱희 교수의 연구논문 ‘1972년 미중 데탕트에서의 미일동맹 문제 처리의 의미와 한계’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 측에 일본 문제를 집요하게 물었다. 키신저 보좌관이 중국을 사전 방문할 때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잇따라 질문을 던졌다. ‘일본은 공공연히 한국과 대만, 그리고 베트남이 자신들의 안보와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위하는 태도입니까? 아니면 위협입니까?’, ‘우리는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신저는 이에 대해 ‘미국 역시 일본의 중무장을 원치 않는다’며 ‘일본에서 군사적 확장주의가 나타나면 미국도 반대할 것’이라며 중국을 안심시켰다. 닉슨 대통령은 좀 더 강한 어조로 중국을 설득했다. ‘미국이 일본을 무방비 상태로 놔두고 떠난다면 결과적으로 일본은 스스로 군대를 만드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닉슨과 키신저는 이때 ‘병 마개론’까지 꺼냈다. 미일안보조약이 일본 재무장을 막아주며 소련처럼 미국과 중국에 위협이 되는 국가와 연계를 차단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논리였다.
합의문 작성 단계에서 미국과 중국은 더욱 첨예하게 부딪혔다. 모두 7차례의 합의문 초안이 오간 끝에 겨우 합의에 이르렀다. 중국이 키신저에게 전달한 두 번째 합의문 초안에는 이런 문구도 들어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군사력이 남한에 진출하는 것을 (중국은) 허용할 수 없다.’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키신저는 훗날 중국이 일본 문제에 대해 ‘고통스럽게 집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중국 방문을 스스로 추켜세웠다. 공동성명이 나온 뒤 미국 기자들에게는 자신의 중국 방문을 ‘세계를 바꾼 일주일(a week that changed the world)’이라고 말했다. 닉슨은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으로 돌아왔다. 방중 성과의 기세로 선거전을 펼친 닉슨은 그해 11월 치러진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를 압도적인 표 차이(선거인단 확보 520 대 12)로 누르고 재선 고지에 올랐다.
상하이 공동선언은 얄타회담(1945) 이후 고착된 미국과 소련 양극이 주도하는 냉전체제를 다극 체제로 변화시켰다. 중국의 국제사회 진입도 더욱 빨라졌다. 안보위협 요인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세계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던 미국과 손을 잡은 중국은 안보를 얻은 뒤 경제개발에 뛰어들었다. 우리도 상하이 공동성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온 것도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조성된 데탕트 분위기의 확산을 원했던 미국의 종용 때문이다.
상하이 공동성명은 한미 동맹도 뒤틀었다.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졌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8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1971년 휴전선 경비를 담당하던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켜 버렸다. 중국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친 닉슨 행정부 안에서는 남은 2사단도 추가로 철수하자는 논의가 공공연히 나왔다. 주한미군은 떠나고 북한은 평화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미국은 북한의 평화회담 제의를 수용하라고 압박하는 상황. 안보 위기를 박 대통령은 영구 집권으로 대응했다. 10월 유신과 핵폭탄 개발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공동선언에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했으나 인식을 공유한 부문도 있다. 당시 회담 기록에는 닉슨과 저우언라이가 “남이든 북이든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강대국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것이다.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명시한 상하이 공동선언을 도출하는 테이블에서조차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보호 대상’이라고 여긴 셈이다. 참으로 걱정이다. 안보동맹으로 맺어진 미국, 제1위의 교역 상대국인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상하이 공동성명 당시의 수준이라면. 한국도 북한도 그저 장기판의 졸(卒)일 뿐일까.
상하이 공동성명 45주년.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이익을 봤을까. 그런 것 같다. 미국이 견제하려던 소련 붕괴까지 이어졌으니까. 안보 불안에 떨던 중국도 경제에 눈을 돌려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대미 수출은 중국의 성장을 이끌었다. 1972년 9,240만 달러 수준이던 양국의 교역액은 2016년 5,789억 달러로 불어났다. 1980년대 초까지 일방적인 대미 무역적자를 기록하던 중국은 2016년 미국시장에서 3,470억 달러 흑자를 거둬갔다. 세계 무역의 위축으로 2015년보다 약 200억 달러 줄어든 게 이 정도다. 미국의 대중 무역수지 적자는 구조적인 측면이 있지만 새로운 갈등 요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보복을 다짐하고 있으니.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트럼프의 등장으로 인한 새판 짜기. 트럼프 당선 이후 상하이 공동성명의 기본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전화로 대화를 나눠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상하이 공동성명 이후 미국이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견지해온 ‘하나의 중국’ 정책이 변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은 이에 대해 ‘하나의 중국’ 정책을 존중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여진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존중과 준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껏 미국은 이 원칙은 준수해왔다.
상하이 공동성명과 트럼프의 정책에는 공통점도 없지 않다. 오랑캐를 다른 오랑캐로 제압한다는 중국의 전통적 전략인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오히려 미국이 써먹는 형국이다. 닉슨이 사회주의에 물들어 잠자는 거인 중국을 흔들어 북극 곰 소련을 잡으려 했던 것처럼, 트럼프도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러시아 카드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 러시아 커넥션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자 트럼프 측은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가 대중국 견제용이라고 몰아가는 분위기다.
닉슨의 평가대로 ‘세상을 변화시킨 상하이 공동성명’ 45주년. 세상은 다시금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으나 이 땅만큼은 최면에 걸렸는지 변화가 없다. 오히려 퇴행 기미까지 보인다. 일본의 군사 대국화에 대한 우려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 왔나. 핵 개발이든 균형자론이든 박정희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까지 최소한의 우리 목소리를 내려던 시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태극기보다 더 큰 다른 나라 국기를 흔들며 보수라고 주장하는 가치 혼란의 시대가 향한 끝이 어디일까. 국제 관계에서 상수(常數)는 자기 나라 뿐이다. 나머지는 변수(變數)에 불과하다. 상하이 공동성명이 그 사례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