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국내 경제에 충격파를 준 카드사태가 터졌을 때다. 카드사들이 카드를 무분별하게 발급하면서 이것이 부실이 됐고, 당시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선봉에 서서 카드사태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부실을 도려내야 했고 경제 파장도 최소화해야 하는 그야말로 퇴로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작업의 핵심이 LG카드 구조조정이었다. 워낙 덩치도 크고 부실도 심해 논란과 반대도 상당했다. 결국 산은은 LG카드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해 회사를 살렸고, 산은의 손실도 최소화했다. 지금은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돼 업계 1위 신한카드로 변모했다.
산은의 LG카드 처리는 국내 구조조정의 ‘완벽한’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배경을 꼽으라면 첫째는 당시 정부가 산은 실무진에 LG카드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면책 레터(방침)’를 내린 것이다. 산은에 힘을 실어주다 보니 원칙대로 구조조정을 해나갈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실무에 능한 산은의 맨파워와 실무진이 흔들리지 않게 외풍을 막아준 산은 경영진의 리더십이 있었다.
그때 LG카드 구조조정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게 류희경-최익종-최용순-이종철 라인이다. 류희경 전 부총재는 본부에서 총괄지휘를 담당했고, 최익종·최용순은 LG카드로 내려가 경영관리단장을 맡아 조직을 장악하는 등 확실한 팀워크를 보여 줬다. 실무진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 사람은 당시 산은 총재였던 재경부 출신의 유지창이었다. 구조조정 막내였던 이종철은 현재 산은의 구조조정을 지휘하는 기업구조조정 실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14년이 지난 지금, 과거 카드사태 당시에 보여준 산은의 패기는 온데간데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어떤 부침이 있었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팀워크도, 유 전 총재와 같은 리더십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로지 ‘혈세 삼킨 대우조선의 파탄 원인은 무능한 산은’이라는 평가만 나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조선의 4,400억원의 만기 회사채가 다음달 말로 바짝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산은은 아직 ‘소난골만 해결되면…’ 이라는 얘기를 주문처럼 외고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사석에서 “글로벌 공급과잉(오버서플라이)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난골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대우조선이 벌떡 살아날 수 있겠느냐”며 “지금이라도 대우조선을 잘게 나눠 돈 되는 것부터 매각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산업은행이 구상하고 있는 ‘소난골 해결→유동성 확보→추가 수주→대우조선 정상화’ 해법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길이다.
지난달 초 이동걸 산은 회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우조선을 살리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솔루션을 내놓지 못했다. 시장의 불안을 달랠 만한 이슈를 던지지 못한 것이다. 대신 시중은행을 향해 “(대우조선에 대한) 보증이나 여신 등의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을 원래대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시중은행의 추가 지원 없이는 대우조선을 끌고 가기 어렵다는 사실상 ‘항복 선언’에 가깝다. 실제 한 시중은행장은 기자와 만나 “지금 남아 있는 익스포저 한도에서만 책임을 지라고 하면 모를까, 그 이상은 무리”라며 선을 그었다.
과거에는 금융당국이 국책은행 뒤에 버티고 있어 시중은행이 듣는 체라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금융 당국도 최순실 사태로 구설에 휘말리면서 힘이 빠질 대로 빠졌고,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치고 나가기’에도 한계가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더 뼈아픈 얘기를 들려줬다. “막말로 대우조선은 지금까지 혈세로 직원들 월급을 줘가며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냐. 대우조선이 갈 길은 뻔하고, 답도 이미 나와 있는데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다.”
산은이 ‘소난골 드릴십’을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사막의 오와시스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 오아시스마저 신기루가 될 수 있다. 산은이 14년 전의 팀워크와 리더십을 발휘해 다시 대우조선의 ‘수술’을 맡아야 한다. /wha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