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증오와 국론 분열, 학살…방데 반란



같은 민족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대하는 게 옳은가. 특정지역 사람들이 쌓이고 쌓인 적폐를 청산하자는 데 반대하고, 외국과 내통해 반란까지 일으켰다면 어찌할까. ‘매국노’라 단정하고 죽여야 하나. 프랑스 대혁명 초기가 딱 이랬다. 혁명 지도부인 국민공회는 반(反) 혁명의 기치를 든 방데(Vendee)지역 말살에 나서 최소한 13만 명을 죽였다. 피해자 측에서는 80만명 가까이 학살 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보수 색채가 강한 지역이었어도 혁명을 반겼던 방데 인근의 분위기가 반혁명으로 바뀐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졌다. 생활비의 절반을 차지하던 식량 구입비가 88%까지 치솟았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 폐쇄 명령. 국민공회는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동참하지 않는 성직자들의 성당을 폐쇄하라고 다그쳐 농부들의 불만을 샀다. 세 번째는 강제 징집. 혁명의 파급을 막으려는 유럽 국가들의 침입에 대응해 2월 발동된 30만명 징집령에 순응하지 않았다.

국민공회는 방데 지역의 분위기가 나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1793년 3월3일, 프랑스 서부 숄레 지역에서 농민들이 낫과 쟁기를 들고 봉기한 이후 반혁명의 기운은 프랑스 서부를 휩쓸었다. 국민공회는 농민을 위한다며 성직자의 특권과 봉건제를 폐지했음에도 반혁명이 거세진데 놀랐다. 국민공회의 생각과 달리 기득권층의 몰수된 재산은 농민보다 도시 출신의 부르주아(자산가)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혁명 이전보다 더 가난해진 농민들 사이에서는 처형 당한 국왕 루이 16세 시절이 더 좋았다는 불만이 나오고, 봉건 귀족과 가톨릭 세력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철학사가 장 프레포지에(Jean Preposiet ·1926~2009)는 저서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반혁명 세력이 규합하는 과정을 ‘징집에 대한 불만과 생활고에 빠진 농민들과 복수심과 증오에 젖어 피에 굶주린 왕당파 간 결합’이라고 봤다.

농민군은 순식간에 6만5,000명으로 불어났다. 국왕에게 충성하는 귀족들의 지휘를 받은 농민군은 사기도 높았다. 스스로를 ‘가톨릭과 국왕의 군대’라고 불렀다. 반란군은 국민공회의 ‘방데의 반대자들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비웃듯 승승장구하며 6월 중순까지 주변을 점령했다. 그러나 기세는 바로 꺾이고 말았다. 농번기를 맞아 병사들이 농지로 돌아간 가운데 4만5,000여 진압군에게 농민군 2만 5,000여명이 희생당했다. 1795년 초 영국의 지원을 받은 망명귀족들과 연합한 재봉기도 무위에 그쳤다.


방데의 반혁명은 도리어 혁명을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지롱드파가 무능하다는 이유로 1793년 여름 권좌에서 밀려나고 보다 강경한 산악파가 정권을 잡았다. 산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주도하는 공포정치 시대가 열리고 날마다 수백명씩 단두대에 올랐다. 외국의 침입과 공포정치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혁명 세력들은 대규모 학살에 나섰다. 명분은 신생 공화국의 안전을 위한 불순분자 완전 제거. 프랑스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도 좋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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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공회는 방데 주민 전체를 ‘프랑스인과 동화할 수 없는 비적 떼 종족’으로 비하하며 ‘번식 능력’까지 칼을 들이댔다. 성인 남자는 물론 ‘생식의 발고랑인 여성’과 ‘반란의 씨앗인 어린 아이’들마저 단두대나 총살 처형대로 끌려갔다. 악질적인 일부 군대에서는 ‘공화파식 결혼’을 전파한다며 남녀의 옷을 벗겨 밧줄로 묶은 후 강에 빠트려 죽였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무려 25만여명의 방데 주민이 학살됐다는 주장도 있다.

방데 반란으로 인한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요즘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혁명군대와 방데 주민이 2대 8의 비율로 100만명 넘게 희생됐다는 추정도 있다. 희생자 수가 과연 얼마인지는 불분명해도 확실한 사실은 방데 반란의 학살은 ‘최초의 근대적 집단학살’로 꼽힌다. 영국 출신 신문기자·역사가이자 정치 운동가인 크리스 하먼(Chris Harman·1942~2009)은 ‘민중의 세계사’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집단 학살(Genocide)은 사회 불안과 공포 정치를 낳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변질시켰다고 간주했다.

방데의 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그 ‘행위’보다도 ‘존재’ 탓에 죽임을 당했다.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 여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가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프랑스 혁명은 실패작”이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렌트는 혁명 세력들이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동질화를 강요하고 생각이 다른 지역에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을 눈여겨 봤다. 각국의 근대 혁명을 비교한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은 획일성 탓에 미국 독립혁명 등과 달리 애초부터 나폴레옹의 전체주의로 향할 수 밖에 없다고 봤다.

방데 반란 발발 224주년. 프랑스에서 ‘방데’는 조심스러운 어휘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금기어로도 통했다고 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오늘날 방데 지역에서 학살의 흔적이나 지역감정을 찾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대신 역사를 관광상품으로 만든 축제와 돈벌이가 한창이다. 송희영 서울예대 교수의 연구 논문 ‘프랑스 방데의 기억문화 유산과 역사 테마파크 퓌디푸’에 따르면 1,500여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초대형 뮤지컬 ‘방데 농민혁명’을 비롯한 역사테마 관광에는 연간 174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와 약 795억원의 돈을 뿌린다.

우리도 아픈 역사의 현장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과거도 그렇지만 현재가 걱정이다.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여기는 인식구조, 헌법재판관마저 공공연히 테러 위협을 받는 사회 분위기, 걸핏하면 ‘다 죽여버리라’고 목청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판 ‘제노사이드’를 대놓고 선동해도 별다른 제재 없이 넘어가는 우리 사회의 앞날이 우려된다. 폭력에 기대려는 증오는 민주주의를 좀먹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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