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부정부패로 출범한 3공화국…4대 의혹사건



정치자금을 마련하려 주가를 조작한 세력이 있다고 치자. 온전할 수 있을까. 그랬다. 처벌은커녕 죽을 때까지 권력을 누렸다. 주가조작과 사행성 기기 수입, 건설 비리에 국내 산업기반을 무너뜨린 특혜로 조성된 비자금으로 출범했다. 1960년대 초반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빠찡꼬)’은 하나같이 나라 경제를 뒤흔든 중범죄였음에도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도덕을 잃은 권력, 부정부패의 습성화도 시작된 것이다.


사상 미증유인 권력에 의한 주가 조작 사건부터 보자. 투자자들은 전혀 몰랐다. 그저 좋았다. 주가가 끝없이 올라가고 거래대금이 늘어났으니까. 1962년 2월의 총거래대금이 85.4억원. 두 달 뒤인 4월에는 1,184.5억환으로 늘어났다. 주가도 뛰었다. 상장주식이라고는 12개 종목에 불과했던 당시 물량이 가장 많았던 대증주(증권거래소주)는 한 달 사이에 4.6배 올랐다. 투자자들은 신이 나 거래에 뛰어들었으나 1961년 말부터 미리 움직인 작전세력이 있었다.

작전세력은 발행물량이 적었던 연증주(증권금융주)를 5개월 사이에 435배나 급등시키며 자금을 불렸다. 물량이 많은 대증주를 작전세력이 손대며 주식시장은 이상 과열로 접어들었다. 유상증자 물량의 할증 발행에도 상승세는 식을 줄 몰랐다. 주가는 끝없이 오르고 5월 거래대금(2,510억환)은 연간 국세수입(1962년 2,212억환)을 넘어섰다. 잘 나가던 주식시장은 5월 말, 증권거래소가 부도에 빠지며 바로 얼어붙었다.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던 당시 거래소는 주식매매를 약속한 거래 당사자가 매매대금을 치르지 못할 경우 대신 결제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돈이 없었다. 주식 거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탓이다.

거래소의 대납자금 부족에 따른 휴장은 정부가 당시 화폐발행액의 16%에 해당하는 280억환을 긴급지원하며 닷새 만에 풀렸다. 그러나 책임 공방전과 3차 통화조치(화폐개혁)의 후유증까지 겹쳐 주식시장은 결국 1963년 2월 무기휴장이라는 결과를 빚었다. 피해는 개미들에게 돌아갔다. 한용원 교원대 명예교수(육사 19기)의 ‘한국의 군부정치’에 따르면 투자자 5,242명이 피해를 입었다. 더욱 고약한 점은 초보가 많았다는 점. 고 김준하 강원일보 사장의 저서 ‘대통령과 장군: 윤보선과 박정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원래 증권시장은 투자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그렇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전국의 공무원, 특히 교육공무원에게 주식 매입을 장려했다.”

군정을 믿고 주식을 샀던 순진한 사람들의 자살이 줄 잇는 와중에 차익을 챙겨간 곳은 중앙정보부. 증권파동으로 중정은 최소한 20억원의 차익을 얻었다. 지금 가치로 약 2,000억원이 넘는 돈은 어디에 쓰였을까. 민정 이양 약속을 뒤엎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만든 민주공화당의 창당 자금에 들어갔다. 당시 미국 안보회의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한국 정세보고서의 한 구절.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증권 조작을 통해 2,000만~3,000만 달러를 벌었다.”


한국 경제는 개미들의 쪽박보다 더 큰 내상을 입었다. 마침 증권 파동 직후 군사정부가 단행한 통화긴급조치(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변경하고 가치를 10분의 1로 평가절하)가 미국의 원상 회복 요구로 사실상 실패하며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물가도 뛰었다. 5.16 쿠데타 이전 1,540원(원 단위로 환산)이던 쌀 한 가마 가격이 2년이 지난 1963년에는 4,400원으로 올랐다. 생활 여건이 어려워진 서민들은 저축할 여력도 잃었다. 증시와 개인 저축이 동시에 위축되며 정부는 외자조달에 목을 걸었다. 이미 부패의 맛을 본 상태. 거액의 차관을 만지는 동안 ‘떡고물’이 성행하고 부패구조가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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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건설사업에서도 상당액이 공화당 창당 자금으로 빠져나갔다. 주한미군을 위무하는 동시에 외화를 획득하자는 명분으로 시작된 워커힐 건설은 민간 공사인데도 연인원 3만여 병력과 4,000여대의 군 장비가 무상으로 투입됐다. 차액은 비밀리에 정치자금으로 들어갔다. 무대 장치에서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품을 중앙정보부 명의로 비관세 무검사로 수입하면서 150만 달러 부당 이익도 챙겼다. 고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특혜 융자와 건설 커미션, 워커힐 공사장의 자재를 대거 공화당사 보수에 전용하는 등 온갖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언론의 워커힐 비리 보도로 주한미군의 워커힐 출입이 금지돼 달러 수입을 기대했던 우리 정부의 외화난이 깊어지기도 했다.

군사정부는 노름 기계까지 손댔다. 재일교포의 재산반입을 명목으로 도박기구인 회전당구대(속칭 빠찡꼬) 880여대를 면세로 들여와 두 배 가격으로 도박업자들에게 팔아 차액을 챙겼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몰아내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부정이 속속 드러나며 세간에 이런 말이 퍼졌다.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뺨친다.’ 군사정권은 집권을 위해 여명기를 맞고 있던 자동차 공업의 싹까지 잘랐다. 일제 승용차 2,000여대를 관광용이라는 명분으로 면세로 수입한 뒤 100%의 마진을 붙여 일반택시로 분양한 새나라자동차 사건까지 일으켰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정책을 보좌한 오원철 전 청와대 제 2경제수석의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에는 이런 구절이 담겨 있다. “자동차 공업도 수공업적으로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름을 ‘새나라’라고 했지만 이것은 일본 차가 새나라(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지 국산품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줘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 기간 자동차 공업 의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잇따라 터지는 비리 의혹에도 꿈쩍않던 군사정부는 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조치에 나섰다. 중정부장에서 물러나 외국 여행길에 오른 김종필은 이때 외유의 목적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무엇이 자의이고 무엇이 타의였을까. 쿠데타 세력의 2인자로 알려진 김종필이 책임을 지는 선으로 정리했다면 박정희 장군은 4대 의혹사건에 얼마나 개입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다. 1995년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 국무부의 ‘한국의 부패 문제’ 보고서에서는 ‘권력이 비리의 몸통’이라고 나오지만 국내 관련자들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다. 관련자들의 고령화로 4대 의혹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4대 의혹사건에서 확실한 점은 하나다. 관련자들이 모두 풀려났다는 점. 군정은 여론이 들끓자 중앙정보부 특별조사반을 편성해 김종필을 외유시키고 1963년 관련자 15명을 구속했으나 그 걸로 끝이었다. 관련자들은 재판 과정에서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그들은 과연 무죄일까. 법의 온당한 잣대와 처벌을 피한 대가가 참으로 크다. 국민경제에 어떤 해악을 입혀도 권력이 뒷배를 봐주면 무사하다는 경험은 한국의 엘리트그룹과 공직 사회를 타락시켰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인물들이 권력과 결탁해 양심을 저버리는 한국병이 이 시기부터 구조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개발에 나서겠다면서도 뒤로는 반칙과 부정으로 돈을 챙긴 4대 의혹사건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몰염치의 극단을 보여주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구조적으로나 혈연적으로 54년 전 불거진 4대 의혹사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희망스러운 점은 오염된 환경이 자정되고 뒤틀린 역사가 원복될 조짐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어느 간 큰 정치인이 권력을 억압과 치부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어느 기업인이 정치권에 선뜻 돈을 내줄까.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적폐(積弊)의 실상이 우리 사회를 맑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적폐의 고리를 떨쳐버릴 때가 찼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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