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더 작고 더 빠르며, 소비전력이 낮은 전자소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실리콘 소재를 활용한 전자소자의 발전은 한계에 다다랐다.
만약 원자 하나로 1비트의 디지털신호를 구현한다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상영된 모든 영화를 USB 메모리카드 한 개 크기의 칩에 담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구자들은 벌크소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나노 단위 이하 물질로 한계 극복에 나섰다.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나노과학 연구단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단장(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은 홀뮴(Ho) 원자 한 개로 1비트를 안정적으로 읽고 쓰는 데 성공했다. 현재 상용화된 메모리는 1비트 구현에 약 십만 개의 원자가 필요하다.
이번 성과는 A. 하인리히 단장이 IBM 재직 시절 주도했다. 연구는 미국 IBM 알마덴 연구소의 주사터널링현미경(STM)으로 진행됐다. STM 조작으로 산화마그네슘(MgO) 기판 표면 위에 놓인 홀뮴 원자는 위(up)와 아래(down) 방향 둘 중 하나의 스핀을 갖는다. 두 경우 전류 크기가 서로 달라 STM으로 전류를 측정해 원자의 스핀을 읽을 수 있다. 만약 STM 탐침으로 홀뮴 원자에 전압 펄스를 가하면 홀뮴 원자의 스핀이 반대로 바뀐다.
또한 연구진은 홀뮴 원자 옆에 철 원자를 놓아, 홀뮴의 스핀을 읽는 일종의 원격 센서로 활용했다. 각 원자가 낱개의 자석인 홀뮴이 만드는 자기장은 철 원자를 반대방향으로 자화시킨다. 철 원자의 전자스핀공명(ESR)을 측정하면, 홀뮴 원자의 스핀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단일 원자의 ESR 측정은 연구진의 독점 기술로 최근 해당 내용이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소개된 바 있다. 원자가 만드는 자기장을 감지해 디지털신호를 읽는 방법으로, 현재 상용화된 하드 디스크가 정보를 읽는 원리와 유사하다.
연구진은 홀뮴 원자 두 개로 총 네 가지 ESR신호를 구분지어 읽는데도 성공했다. 홀뮴 원자들은 1nm 정도 간격으로 밀집해도 서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만큼 원자를 촘촘히 배열할 수 있어, 저장밀도를 혁신적으로 높일 수 있다.
A. 하인리히 단장은 “홀뮴 원자들이 근접해도 스핀에 영향을 거의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를 규명하고 보다 높은 온도에서 재현하는 것이 다음 목표”라며 “두 가지 스핀 상태가 공존하는 양자 제어가 가능하도록 추가적인 연구가 뒷받침 되면 양자컴퓨팅을 위한 큐비트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 3월 9일자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2017년 1월부터 IBS의 양자나노과학 연구단으로 자리를 옮긴 A. 하인리히 단장과 이달부터 IBM에서 연구단으로 합류한 최태영 연구위원은 대한민국 기초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