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양심과 상식의 승리…아미스타드호 사건



1839년 7월 초, 쿠바 인근 해역, 136t 짜리 스페인 노예무역선 ‘아미스타드’호(La Amistad). 노예로 팔려갈 흑인 53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배를 접수한 흑인들은 백인들을 모두 처형하고 두 명만 남겼다.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뱃길과 항해술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스페인 선원들은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시늉만 냈다. 낮에는 동쪽으로 항해하고 밤에는 서쪽이나 북쪽 바다로 되돌아가는 통에 아미스타드호는 한 달 보름 동안 서인도제도의 바다를 맴돌았다.

식수 보충을 위해 육지에 접안하려던 아미스타드호는 미국 밀수감시대(USRC·해안경비대의 전신) 워싱턴호에 걸려 미국으로 견인돼 재판을 받았다. 노예해방론자인 미국인 변호사들은 승소할 것으로 믿었다. 재판관할권이 있는 코네티컷주는 노예 반대론이 우세한 자유주(free state)여서 흑인에게 동정적인 판결을 믿었다. 법원의 논점은 아미스타드의 흑인들의 지위. 자유인이냐 노예냐가 쟁점이었다. 코네티컷주 순회법원은 흑인 측 변호사들의 기대대로 1840년 4월 ‘흑인들은 불법 납치된 자유인으로 백인에 대한 저항과 살인도 정당방위’라는 판결을 내렸다.


흑인들은 환호했으나 판결은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당장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이 들고 일어났다. 재선을 위해 남부의 표가 아쉬웠던 밴 뷰런 대통령은 코네티컷 주법원의 판결에 불복, 직접 항소해 재판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연방대법원에서는 이해 당사자들의 견해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연방 검사는 아프리카 야만인들을 살인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스페인 정부는 아미스타드호와 ‘화물인 흑인’에 대한 권리는 스페인에게 있다며 조속한 인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미국 밀수감시대도 끼어들었다. 연방법의 보상규정을 들어 화물(흑인)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흑인)이 행한 동일한 행동(저항)을 두고 이렇게 견해가 엇갈리는 현상을 흑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이 ‘추장’ 말고는 마땅한 통역어가 없었던 상황에서 하늘 같은 추장이 내린 결정(주법원 판결)을 다른 추장(연방 대법원)이 다시 뒤집을 수 있는 현실을 속임수로까지 여겼다. 흑인들과 백인 변호사 간 소통도 원만하지 못한 가운데 일각에서는 ‘순교론’까지 나왔다. 미국 북부와 남부 간 노예제도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아예 아미스타드호의 흑인들이 처형 당한다면 동정적인 여론이 일고 노예 폐지론에 힘이 실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흑인들은 든든한 방패를 얻었다. 존 퀸시 애덤스가 변호를 맡은 것이다. 전직 대통령(6대)이자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아들, 코네티컷주 상원의원인 애덤스는 자신이 임명한 대법관들 앞에서 장장 8시간 동안 미국의 건국 이념에 비추어도 ‘아프리카의 자유인에서 불법적으로 끝려온 흑인들의 선상 반란은 정당하며 자연권의 행사’라는 요지의 변론을 펼쳤다. 판결문을 작성한 조셉 스토리 연방 대법관은 애덤스의 변론에 대해 ‘건국 이념을 근거하면서도 강렬한 수사와 신랄한 풍자의 극치’라는 평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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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연방 대법원은 1841년 3월9일,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아미스타드호 의 흑인들은 어느 나라의 법, 심지어 스페인 법을 적용해도 자유인이며, 불법적으로 체포, 납치, 수송된 자유민이기에 노예의 신분과 재산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법리가 적용될 수 없다. 아미스타드호의 흑인들은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미국은 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낼 의무가 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까지 살아남은 39명 흑인들은 미 해군의 보호를 받으며 1842년 자유인 신분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에 경악한 스페인 대사는 ‘대통령의 뜻이 통하지 않는 법원은 자격이 없다’며 항변했지만 과연 그럴까. 현직 대통령의 뜻을 거스른 당시 연방 대법원의 판결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명판결’의 하나로 손꼽힌다. 뿐만 아니다. 원주민(인디언)과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에서 ‘인류의 존엄한 양심에 의거한 한 줄기 빛’으로 남아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보편적 양심은 아름답다. 시간과 공감을 넘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아미스타드호 판결 20년 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터졌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된 것이다. 남북전쟁은 수많은 성격을 갖고 있지만 노예제도에 관한 한 상식이 특권을 이긴 역사적 사례로 꼽힌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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