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찰스 1세…‘나는 불통이로소이다’



388년 전 오늘인 1629년 3월10일,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힘으로 의회를 닫았다. 의장석을 점거하며 폐회에 저항하던 의원들은 국왕의 병사들에게 끌려나갔다. 찰스 1세의 눈 밖에 났던 의원 9명은 구금 당했다. 이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려 11년 동안 의회가 열리지 않고 찰스 1세의 독재가 시작될 줄은.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몰랐던 게 또 있었다는 사실. 영원한 권력을 누릴 것 같던 찰스 1세는 의회의 저항에 부딪치고 영국은 피비린내 나는 내란(청교도혁명·1642~1649)을 겪었다. 국론이 분열돼 나라가 조각날 판에도 국왕의 권위만 중시했던 찰스 1세는 결국 도끼에 목 잘려 죽었다.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한 이유는 돈. 1625년, 25세 나이에 즉위하는 순간부터 젊은 국왕은 돈이 모자랐다. 부친인 제임스 1세도 마찬가지로 늘 쪼들렸다. 자식이 없어 친척인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영국왕으로는 제임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하직한 엘리자베스 1세가 남긴 부채가 약 42만 파운드.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남긴 유산을 정리하면 10만 파운드를 상속받은 셈이던 제임스 1세는 사치와 외국과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 사망하면서 60만 파운드가 넘는 빚을 남겼다. 제임스 1세는 돈이 부족해도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마음껏 썼다.

문제는 제임스 1세의 경우 의회와 타협하며 왕권을 행사한 반면 그 아들 찰스 1세는 소통의 능력이 없었다는 점. 왕은 법과 의회 위에 있는 절대권력이라고 믿었다. 다른 단점도 많았다. 우선 사치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종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신민(臣民)들의 편을 갈랐다. 결정적으로 측근 정치에 의존하고 사적 원한과 혈연 관계로 원칙과 명분 없이 전쟁을 치렀다. 돈이 모자랄 수 밖에 없었다. 즉위한 이래 세 번째 소집한 의회에 대한 찰스 1세의 요구. ‘돈, 돈을 다오.’


찰스 1세는 사정이 절박했다. 25만 파운드가 넘는 전비를 들여 30년 전쟁에 끼어들었으나 연패의 늪에 빠졌던 상황. 찰스 1세는 사적 감정의 공공화 목적에서 전쟁을 벌였다. 라인팔츠 선제후이며 보헤미안 국왕이던 매형 프리드리히 5세를 도와주려던 것. 마침 매형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영지를 빼앗긴 채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었다. 스페인을 공격하면 매형이 실지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막상 전쟁을 제한적으로 치르는 데에도 막대한 비용은 물론 7,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패전 뒤처리에도 돈이 필요했다. 빚은 89만6,000파운드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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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소집된 세 번째 의회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찰스 1세는 전시에 해안 지방에만 부과되던 건함세를 평시에도 전국적으로 거두고 수출입관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의회는 되려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의 승인을 요구하고 나섰다. 돈이 급했던 찰스 1세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권리청원’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최측근이자 친구인 버킹엄 공작(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프랑스 왕비의 애인으로 묘사된 인물. 찰스 1세보다 8살 위인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무능하고 욕심 많은 귀족으로 평가받는다. 합스부르크 출신 프랑스 왕비와 불륜 관계도 외국인 왕비에 대한 근거 없는 질시와 뒤마의 상상력이 결합한 결과로 보인다)이 ‘국왕의 총기를 해치는 간신’으로 지목받아 영국군 장교에게 암살 당한 뒤부터 찰스 1세는 더욱 평정심을 잃고 끝내 의회까지 폐쇄해 버렸다.

의회를 반대파의 소굴로 여겼던 찰스 1세는 무려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역사에 남은 잉글랜드 의회 소집 기록을 보면 헨리 3세부터 찰스 1세까지 293년 동안(1236~1629년) 의회 소집은 모두 250회. 1년에 평균 0.85회씩 개회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찰스 1세는 의회와 소통에 담을 쌓았던 셈이다. 의회를 오랫동안 열지 않은 두 번째 기록은 찰스 1세의 부친인 제임스 1세가 갖고 있다. 6년 7개월 동안 의회를 비웠다. 불통 인자의 유전. 부전자전이 따로 없다.

찰스 1세는 의회의 도움 없이도 국정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여겼으나 그럴까. 우선 세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1634년과 1635년에 건함세 명목의 세수가 31만 2,000파운드. 연간 재정이 120만 파운드 안팎이던 시절, 미미하던 세목이던 건함세를 이 정도 거뒀다는 사실에서 세금 징수가 가혹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찰스 1세는 외상으로도 세금을 거뒀다. 내년에 거둘 세금을 징수업자에게 일부 떼어주며 미리 걷은 것이다. 여기에 선왕 시절부터 내려온 사치는 계속되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이 잇따랐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종교적 포용 정책은 잊고 가톨릭 색채가 강한 영국국교회를 강요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의 반발까지 불렀다.

일방통행식 국정과 의회 무시, 측근에 의존한 정치, 대를 이은 사치와 개인 원한에 얽힌 오락가락 외교는 결국 안팎의 적대감을 키웠다.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기세를 높이던 상황. 사면초가 상태에서 11년 1개월 2일 만에 소집된 의회마저 깨버렸다. 소집 53일 만에 해산된 단기의회에 대한 아쉬움과 소통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찰스 1세가 소집한 마지막 의회는 20년 동안 이어지며 장기의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외적(스코틀랜드)을 불러들이고 나라가 찢어지는 내전까지 불사하며 권좌를 지키려던 찰스 1세의 권력은 장기의회 회기 내에 끝났다. 찰스 1세의 목을 날린 공화정은 151만 파운드의 빚도 물려 받았다. 불통의 대가가 참으로 컸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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