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이 16일(현지시간) 2018 회계연도(2017년 10월~2018년 9월) 재량지출 예산안 제안서를 공개하며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첫 예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에 입각해 ‘하드 파워’에 해당하는 국방부·국토안보부·보훈부 예산만 증액하고 민생과 대외 원조 관련 예산은 모두 삭감했다. 중앙부처 15곳 중 이들 3개 부처를 제외한 12개 부처가 처참하게 칼질을 당했다. 국방비 증액분을 메우기 위해 전체 15개 부처 가운데 12곳의 예산을 희생하는 셈이다.
예산안은 미 연방정부 총예산 약 4조달러(4,700조원) 가운데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에 해당하는 1조달러 규모다. 나머지는 법률 등에 의해 집행되는 의무지출로 전체적인 예산안은 5월께 추가로 나올 예정이다.
이날 공개된 예산안에 따르면 국방 부문이 크게 증액됐다. 소련과 군비 경쟁을 벌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0년대 이후 가장 큰 폭의 증액이라는 게 현지 언론들의 설명이다. 트럼프 정부는 국방예산 자동삭감 제도(시퀘스터)를 폐지하는 방식을 통해 기존 국방비 상한선보다 10% 늘어난 5,740억달러로 편성해줄 것을 제안했다. 유사시 임의로 쓸 수 있는 비상작전 예산 650억달러를 합하면 전체 국방예산은 6,390억달러로 늘어난다.
국방비 대부분은 군비 전력 증강에 쓰이고, 이슬람국가(IS) 등과의 전쟁 등 대(對) 테러 및 평화유지와 관련한 전쟁 수행에 들어가는 예산도 포함됐다. 국방부 기본 예산 5,740억달러는 군수물자 구매와 장비 현대화, 병력 증원, 사이버전 등에 쓰이고 해군 함정을 늘리기 위한 장기 계획의 첫 예산도 들어갔다.
국토안보 예산도 28억달러(6.8%) 증액을 요구했다. 이는 대부분 불법이민 차단을 위한 미·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에 사용될 예산이다. 핵안전보안국(NNSA) 예산은 11.3%인 14억달러, 퇴역군인 보훈 예산은 5.9%인 44억달러 늘어나도록 편성했다.
안보 예산 증액의 반대급부로 환경과 외교 부문은 직격탄을 맞았다. 환경보호청(EPA) 예산은 82억달러에서 57억달러로 31.4% 줄어든다. 이는 40년 만에 가장 작은 금액으로, 환경 규제에 반대해온 스콧 프룻 EPA 청장이 백악관에 요구한 규모(70억 달러)에도 못 미친다. 이 여파로 EPA 공무원 3,200명이 감원되고, 50여 개 환경 프로그램이 폐지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외교 예산도 대외원조 분야에서 무려 28.7%인 100억달러 삭감된다. 국무부와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의 대외원조 예산으로 유엔 분담금도 포함돼 있다. 애초 트럼프 대통령은 국무부 예산을 최대 37% 삭감할 계획이었으나, 의회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권고를 고려해 삭감 폭을 다소 줄인 것으로 전해졌다. 저개발국 지원을 위한 세계은행(WB) 분담금도 삭감됐다.
나머지 분야의 예산들도 10∼20% 정도 삭감된다. 노동부는 20.7%인 25억달러, 농업부도 20.7%인 47억달러, 보건복지부는 16.2%인 126억달러, 교통부는 13%인 24억달러, 상무부는 15.7%인 150억달러의 삭감폭을 보였다. 교육부도 13.5%의 예산이 잘려나갔다.
특히 각종 빈곤 퇴치 기금과 재단 재원이 크게 삭감되거나 아예 폐기되면서 저소득층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될 처지에 놓였다. 아프리카개발재단, 저소득가정 에너지 지원 프로그램, 타이거교통보조금, 미국노숙자지원합동협의회 등은 아예 지원이 끊기게 된다.
기후변화 대응을 비롯한 해양·기상 연구 예산도 적잖은 타격을 받게 된다. 국립예술기금(NEA)과 국립인문학기금(NEH), 우드로윌슨센터의 예산 지원이 책정되지 않는 등 문화예술계와 학술 지원도 대폭 줄어든다. 공영 라디오 NPR과 공영 TV PBS에 대한 자금지원을 담당하는 공영방송공사(CPB) 예산도 삭감될 처지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예술과 과학 분야, 저소득층이 직접적인 타깃이 됐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