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미국의 수도에서 화려한 벚꽃 축제가 열린다. 1912년 일본이 기증한 벚꽃 나무를 옮겨 심은 날을 기념하는 축제다. 미국 동북부의 봄을 알리는 이 축제는 연날리기와 폭죽, 가장행렬 등 다채로운 행사로도 유명하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 150만명이 먹고 자고 즐기는 데 쓰는 돈으로 지역 경제도 짭짤한 수익을 올린다. 정작 눈길이 가는 대목은 따로 있다. 자세히 들여보면 축제의 주인공이 미국인지 일본인지 헷갈린다는 점이다.
미국인 부부가 기모노 차림으로 축제 대열에서 행진하고 일본 기업들의 간판이 교묘하게 배열돼 있다. 갈수록 축제의 내용도 미국과 일본의 친선과 우정을 다지는 내용 일색이다. 겉은 미국인들의 축제지만 속은 일본 판이다. 미국인들은 이 축제를 ‘워싱턴 벚꽃 축제’ 또는 ‘전미 벚꽃 축제(National Cherry Blossom Festival)’라고 부르지만 미국판 ‘사쿠라마츠리(さくらまつり)’에 가까워 보인다. 일본 문화 수출의 첨병인 셈이다.
한국인으로서 워싱턴의 벚꽃 축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착잡하다. 같은 동양권 국가이며 이웃 나라인 일본의 문화상품이 미국 수도에서도 통하는 게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벚꽃에는 침탈과 왜곡, 난개발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탓이다. 먼저 일본 벚꽃이 어떻게 미국으로 갔는지부터 살펴보자. 시초는 일본을 좋아하는 미국 여성의 집념이었다. 벚꽃을 미국에 이식한 최초의 주인공은 엘리자 시드모어. 작가이며 사진가, 네셔널지오그래픽의 첫 여성 회원인 그는 29세인 1885년 일본을 방문한 이후로 벚꽃의 아름다움과 일본 문화에 흠뻑 빠졌다.
귀국하자마자 시드모어는 미국의 공유지에 벚꽃을 심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은 빗나갔다. 워싱턴 특별행정구역 출범 100주년을 맞는 1901년에 벚꽃을 만개시키겠다는 시도는 자금 부족으로 성사되지 않았어도 그는 끈질지게 밀고 나갔다. 대규모 이식이 성사된 계기는 돈 많은 식물학자인 데이비드 페어차일드와의 만남. 전화 발명가 알렉산더 벨의 사위인 페어차일드는 1906년부터 2년간 1,300그루를 수입해 대규모 이식의 길을 텄다.
시드모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영부인인 헬렌 헤런 태프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침 1907년 일본을 방문했던 영부인도 일본 문화에 호감을 갖고 있던 터. 대통령 하워드 태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무장관 재임시 일본과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을 나눠 갖자는 비밀합의인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의 주인공이었던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의 공터에 벚꽃을 심는데 찬동했다. 일본은 이런 동향을 알아채고 한 걸음 빨리 움직였다. 미국에 선물하겠다고 거꾸로 제안한 것이다.
도쿄 시장 겸 중의원 의원인 오자키 유키오(尾崎 行雄·41세인 1889년부터 죽기 2년 전인 1952년까지 25선을 기록하며 63년 동안 중의원을 지낸 정치가. 태평양전쟁 패전 뒤에는 ‘영어공용어론’을 주장한 인물이다)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도운 미국에 보답해야 한다며 1909년 벚나무 2,000그루를 보냈다. 오자키가 보낸 벚나무는 이듬해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량 소각됐다. 미국 농무부의 검역 결과 해충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오자키는 일본에서 좋은 품종을 고르고 골라 ‘요시노 품종’을 비롯한 12개 종, 3,020그루를 새로 추렸다.
1912년 3월27일, 미국 대통령 영부인과 주미 일본대사 부인은 워싱턴의 포토맥 타이들 베이슨(Potomac Tidal Basin)의 북쪽 둔덕에 일본이 다시 보낸 벚나무 가운데 두 그루를 심었다. 일본은 1913년부터 1920년까지 1,800그루를 더 선물했다. 일본산 벚꽃이 포토맥 강변을 하얗게 수놓자 워싱턴의 시민단체들은 1935년부터 축제를 벌였다. 첫해에 3일간 치러진 벚꽃축제 기간이 요즘에는 한 달 동안(2017년은 3월15일~4월16일) 이어진다. 벚꽃이 얼마나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1938년 제퍼슨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벚나무를 베어낸다는 소식에 지역 여성들이 나무에 쇠사슬을 감고 반대 시위에 나선 적도 있다.
워싱턴 벚꽃의 위기도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사흘 뒤 미국인들은 벚꽃 나무 네 그루를 도끼로 찍어냈다. 벚꽃 나무들의 이름도 ‘일본 벚꽃’에서 ‘동양 벚꽃’으로 바뀌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한 벚나무 손상을 방지하자는 의도에서다.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인 이승만 박사가 ‘일본 벚꽃’ 대신 ‘한국 벚꽃’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하고 미국 내무부가 이를 ‘코리안 체리’는 곤란하고 ‘오리엔탈 체리’로 바꿨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영어권 자료에서는 근거가 많지 않아 검증이 필요한 대목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산 벚꽃은 이름을 되찾았다. 패전국 일본이 미국에 폭격으로 불탄 벚꽃 단지 복원에 필요하다며 종자 기증을 요청한 적도 있다. 1948년부터는 벚꽃 축제도 다시 열렸다. 일본은 전후 복구가 끝난 1965년 추가로 3,800개 묘목을 더 보냈다. 일본 기업인들도 벚꽃 거리를 수놓는데 힘을 보탰다. 석탑과 일본식 정원을 비롯한 각종 부대 시설이 워싱턴은 물론 미국 곳곳에 일본 기업의 후원으로 세워지고 관리되고 있다.
한국과 워싱턴 벚꽃의 인연은 또 있다. 시간이 흐르며 워싱턴에 기증된 일본산 요시노 품종의 원산지가 제주산 왕벚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은 이를 한사코 부인하지만 국내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심지어 오자키 유키오 시장이 두 번째로 선적한 3,020그루는 제주도 산과 들을 파헤쳐 뽑아간 것이라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까지 벚꽃 원산지 논쟁에 끼어들었다. 전세계 벚꽃 80% 이상의 원산지가 중국이라는 것이다.
벚꽃은 일본의 군국주의와도 관련이 깊다. 벚꽃으로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조명한 역저 ‘벚꽃의 비밀’을 쓴 류순열 세계일보 논설위원에 따르면 벚꽃은 9세기부터 일본과 다른 국가와 차별성을 부각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8세 중후반 활동한 일본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일찍이 ‘일본 정신의 빛나는 본류인 사무라이는 벚꽃처럼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대화 물결 속에서 벚꽃은 일본의 정체성을 지키는 도구로, 국수주의와 국왕을 위한 맹목적 충성, 덧없는 죽음을 강요하는 이미지로 쓰였다.
류 위원의 저서 ‘벚꽃의 비밀’에는 주목할만한 대목이 나온다. 벚꽃은 한국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대통령은 친일파는 중용했어도 ‘왜색(倭色·일본풍)’에 대한 증오심으로 관련 예산을 완전 삭제하는 등 벚꽃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달랐다. 벚꽃을 좋아해 시를 지은 적도 있다. 진해와 국회의사당 주변, 전주-군산간 국도에 벚꽃이 대거 심어졌다. 류 위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진해군항제를 하얗게 물들이는 벚꽃도 일본이 일부러 공들여서 보낸 것이다.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재일교포와 일본 중견언론인과 식물학자, 관광회사 간부들은 벚꽃 6만여 묘목을 진해에 기증했다. 국회를 감싸는 벚꽃도 ‘한일친선협회’가 기증한 것이다.
벚꽃은 아름답다. 미국인들이 반할 만 하다. 우리라고 다를까. 관광객들은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더듬기보다 벚꽃 축제를 즐기러 진해를 찾는다. 자연으로써 벚꽃이 무슨 죄가 있으랴. 그러나 벚꽃을 둘러싼 인간의 역사를 살짝 들춰보면 마냥 홀리기에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세계의 중심, 워싱턴을 수놓는 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산 왕벚꽃인지 아닌지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일본 왕의 핏줄에 한국인 혈통이 흐른다는 논제만큼 무의미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역사다. 일본 문화에 심취한 미국인, 강자의 환심을 얻기 위한 일본인의 끈기는 과거 완료형이 아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전쟁에서 원수로 싸웠던 미국과 일본이 요즘 찰떡 공조를 보이고 있다. 반면 해바라기처럼 오로지 미국만 바라봤던 한국은 찬밥이다. 국론 분열과 중국의 반발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무릅쓰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까지 배치한다는 데도 미국이 보기에 일본은 동맹이고 한국은 파트너에 불과하단다. 미 국무부는 위안부를 ‘갈등을 유발하는 여성’이라고 지칭해 논란을 불렀다.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다시 봄이건만 봄 같지 않다. 황사로 희뿌연 하늘 아래 벚꽃의 물오른 꽃망울마저 야속한 계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