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지우개를 머리에 단 연필

지우개를 머리에 단 연필






토머스 에디슨과 어네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백, 그리고 이어령. 연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발명가 에디슨은 조끼 주머니에 딱 맞는 몽당연필을 애용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단 두 자루의 연필로 소설 한 권을 쓴 적이 있다. 소설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존 스타인 백은 ‘장미 꽃잎처럼 섬세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연필로 글을 썼다. 문화평론가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은 첨단노트북을 일찍부터 활용했으면서도 연필 찬양론자다.

왜 연필인가. 흑연과 종이가 닿는 촉감이 부드럽고 오래 쓸 수 있다. 값도 싸다. 볼펜으로 선을 긋는다면 최대 길이가 1㎞인 반면 연필은 56㎞에 이른다. 문사철(文史哲)은 물론 문명사와 과학의 범주를 자유롭게 여행한 이어령의 저서 ‘지우개 달린 연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연필은 나무 속에 박힌 일종의 검은 광맥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어두운 지하의 탄광을 캐 들어가는 광부의 곡괭이질이다.…(중략)…연필은 삼나무의 향기로운 냄새에 둘러싸여 조용히 잠들어 있는 신비한 물체다’.


가장 저렴하고 오래가는 필기구인 연필의 시발점은 1564년. 폭풍우에 뽑혀 나간 영국 시골 마을의 거목 뿌리에 흑연이 딸려 나오면서 비롯됐다. 이듬해에는 독일계 스위스인 과학자가 삼나무 사이에 흑연을 끼워넣는 형태의 연필을 개발해냈다. 연필의 품질 향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곳은 독일의 파버 카스텔사. 1761년 설립돼 무려 256년간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육각형 등 연필 표준의 거의 대부분이 이 회사에서 나왔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큼은 미국이 원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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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의 세계 1위 회사가 놓친 것은 ‘지우개가 달린 연필’. 연필과 지우개의 결합은 유태계 미국인 하이멘 립먼(Hymen Lipman)의 손에서 이뤄졌다. 자메이카 출신의 봉투 판매업자 겸 발명가,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41세인 1758년 3월30일 특허를 따냈다. 미국 특허번호 19,783호. 립먼은 취득 4년 뒤 특허권을 조셉 레켄도르퍼에게 10만 달러에 넘겼다. 현재 가치 1,750만 달러(미숙련공 임금상승률 기준)에 달하는 거액의 특허권료 뿐 아니라 매년 매출의 2%를 받았다.



립먼은 해마다 수천 달러씩 특별 배당금을 받았으나 정작 레켄도르퍼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경쟁 연필업자들의 소송에 걸린 탓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875년 ‘립먼이 받은 특허권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기존의 제품인 연필과 지우개의 단순한 결합에 지나지 않기에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독점에서 해제된 고무 지우개가 달린 연필은 곧 미국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특허권료와 특별 배당으로 이미 큰 부자가 된 립먼은 76세로 사망할 때까지 부를 누렸다. 립먼의 아이디어 역시 간단한 발상의 전환이 대발명으로 이어진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연필을 비롯한 한국의 필기구 산업은 사양 길을 걷고 있다. 중국산의 저가 공세와 일본 문구류의 강세 때문이다. 연필을 사용하는 수요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독일 파버 카스텔사는 연필 분야의 기술집약형 경쟁력을 바탕으로 59억 유로(약 8조2000억원·2013년 기준) 매출을 올린다. 수요가 그만큼 살아 있다. 낮은 임금을 쫓아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다른 글로벌 업체와 달리 고향에서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산 연필의 수요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문화 평론가 이어령에 따르면 ‘지우개 달린 연필’은 ‘쓰기와 지우기’라는 상반된 행위의 결합이다. 쓰고, 잠시 중단해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사고가 싹틀 수 있다. 지우개를 머리에 단 연필이야말로 창조적 사고의 샘물이다. 이어령은 이렇게 강조한다. “연필처럼 유연한 사고여야 한다. 한 번 쓰면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잉크펜이나 볼펜 같은 경직된 사고(思考)에서는 결코 창조적 생각이 태어나지 않는다. 고정관념을, 편견을 그리고 일상성에 토대를 둔 도구적 사고를 지울 수 있는 하나의 지우개, 연필과 함께 붙어 있는 지우개, 이것이 앞으로 다가오는 지식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고의 틀이다. 쓰고 지우고, 지우고 써라. 지우개가 달린 연필로 사고하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다만 국내에 소개된 립먼의 발명 사례는 근거가 취약한 대목이 적지 않다. 립먼이 가난한 10대 화가 시절에 지우개 달린 연필을 고안하고 특허를 내라는 대학생 친구의 조언에 따라 특허권을 따냈다는 내용이 주류지만 출처가 불명확하다. 특허권 취득 당시 립먼은 이미 불혹(40세)을 넘긴 나이였다. 립먼은 12세 되던 해인 1829년 출생지인 자메이카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했을 뿐이다.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 검색에서는 ‘가난한 10대 화가 시절에 발명했다’는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어 자료에서는 적지 않게 나온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일본에서는 발명 진작을 위해 창작이 섞인 엉터리 번역물이 넘쳤다. 국내에도 잘못된 정보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발명 이야기’에는 이런 사례가 유난히 많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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