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재욱은 최근 종영한 OCN 드라마 ‘보이스’에서 희대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모태구’ 역으로 분해 짙은 공포를 선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에 없던 철저한 악인(惡人) 임에도, 그가 펼치는 핏빛 변주와 함께 내뿜는 섹시함과 퇴폐미에 빠져드는 시청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악인일지언정 어떤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끌렸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뭔가 끔찍하고 가까이가면 안될 것 같으면서도 자꾸 시선이 가는 그런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접근을 했던 것 같아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발아래 있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조차 하나의 놀이처럼 즐겼던 모태구. ‘컷’ 소리를 들어도 쉽게 털어낼 수만은 없던 농도 짙은 인물이었던 만큼 결말 역시 가장 모태구스럽게 장식했다. 또 다른 사이코해스에 의한 죽음을 당한 것. 다소 상징적이면서도 컬트적인 표현에 일부 시청자들은 결말의 의미에 대해 궁금증을 제기하기도 했다.
“‘권선징악’이라는 틀 안에서 모태구는 시청자들이 통쾌해 할 수 있는 최후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판타지적 요소가 신에 가미가 됐고, 해석의 여지도 많지만 결국에는 경찰의 손이 아닌 또 다른 큰 악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 사회의 ‘끊이지 않는 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수많은 장르물 가운데서도 ‘보이스’는 유난히 잔인하고 적나라한 묘사를 선보였던 탓에, 촬영에 임하는 배우들 역시 적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었음을 종종 각종 매체를 통해 언급해왔다. “저는 누구를 죽이는 역할이라 다른 배우들만큼 놀라는 건 없었어요”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의 고충은 있었다.
“쇠공을 후려치고 난 후에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거나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다거나, 행위에서 오는 후폭풍들이 계속 생겼어요. 연기이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나로 인해 생이 끝나가는 사람을 몇 명씩 마주치다 보니 점점 힘들어지더라고요. 그 지점을 넘고 나니 마지막 대식이를 죽일 때 장면은 일말의 죄책감이나 죄의식 없이 소화했던 것 같아요”
모태구라는 인물이 주던 이러한 깊은 잔상은 시청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김재욱의 재발견’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그의 연기에 대한 호평을 보냈다. 김재욱 역시 ‘보이스’를 하기 전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종류의 시나리오들도 들어올 수 있겠다는 기대는 생겼지만, 연기에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 필모그래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좋은 배우라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보다 스스로도 좋은 작품에 출연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 캐릭터 하나가 잘 보인다고 해서 절대로 그 작품의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않거든요. 모든 게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 ‘보이스’가 그에게 큰 의미를 남기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배우가 자신감을 가지고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도 포인트를 캐치해 인물의 매력을 150%까지 끌어 올려주는 김홍선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 그리고 극의 중심축을 담당한 장혁과 이하나까지. ‘보이스’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 보인 집중력 덕분에 또 하나의 명품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특히, 김재욱은 8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모태구가 어떤 이질감 없이 극에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은 무진혁(장혁 분)과 강권주(이하나 분)라는 캐릭터가 만들어냈던 단단한 기반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있었기에 극의 긴장감과 재미가 이어질 수 있었다고 공을 도리기도 했다.
물론, ‘커피프린스’의 ‘와플선기’나 ‘서양골동양과자점엔티크’에서 보여준 ‘마성의 게이’ 등을 통해 그에게 고착된 이미지를 어느 정도 씻어낸 것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달성한 소기의 성과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이전까지 연기를 못하는 배우로 분류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기보다는 이미지가 먼저 거론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저에 대해 오랫동안 고착화되어 있는 이미지를 바꿀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으로 배우로서의 행보를 달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변화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작품과 역할을 만나오면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면 차츰 김재욱이 이런 톤의 연기를 한다는 것도 보여드릴 수 있겠죠”
사실, 드라마나 영화 외에도 뮤지컬 ‘헤드윅’, 밴드 ‘월러스’ 활동까지 선보였던 김재욱을 어떤 한 단어에 집약시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조근조근 늘어놓는 이야기 가운데, 중간 중간 내뱉는 위트는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김재욱이라는 배우에 대한 새로운 지점과 맞닿아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모태구 같은 악역의 매력도 맛본 만큼 언젠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캐릭터도 기다려보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김재욱은 오롯이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에게 가해진 틀을 깨부수고 있는 중이다. 김재욱의 1년 뒤, 그리고 10년 뒤가 기대되는 순간이다.
“앞으로 어떤 에너지나 성격을 가진 캐릭터를 만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다시 좋은 작품을 통해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조급해하지는 않되 너무 느리지 않게 잘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서경스타 이하나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