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당신도 '오이코패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절규

침묵했던 소수 취향들이 목소리를 내다

오이도, 당근도... 쌀국수 '고수' 같은 존재





한 번이라도 냉면집에서, 김밥집에서 혹은 중국집 배달 요리를 먹을 때 오이를 빼내는 사람을 보면서 ‘다 큰 사람이 왜 오이를 편식하느냐’고 면박을 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오이 기득권자’다.


오이 알러지가 있다는 사람에게 오이를 먹게 한 당신은 ‘오이코패스(오이+사이코패스)’로 불릴 가능성이 있다. ‘오이 가지고 무슨 기득권이야?’라는 반응을 보이는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오이를 싫어한다’는 공통점 하나로 모여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싫모)’ 회원들이다. 지난달 27일 처음 개설된 이 페이지는 일주일만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이 9만명을 넘어섰다.



이 페이지에는 ‘좋아요’ 갯수 만큼이나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한 ‘오이 수난사’를 보낸 이들의 자기 고백이 이어지고 이들을 응원하는 댓글이 이어진다. 심리 상담소 같기도 하다. 이들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살 만한 세상을 만든다’는 모토를 내세운다. 오이를 싫어하는 이들이라면 미리 화장지를 준비해놓고 읽어야 할 고백도 많다.

식당에서 나이 먹은 아저씨가 편식한다고 할까봐 두려워 40년째 냉면집 근처에도 안 간 ‘오이싫어남’, ‘고등학생 때 오이를 못 먹자 담임 선생님이 억지로 먹여 화장실에서 남몰래 구토를 했던 ‘트라오마남’, 상한 우유보다 오이 냄새가 더 비릿하게 느껴져 김밥집, 초밥집에서도 마음을 못 놓는 ‘오이무서워녀’ …….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연인에게도 오이 삼키기를 강요받고 학교나 직장에서도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다.

‘오싫모’는 현재 대학에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20대 중반 A씨가 혼자서 개설해 시작됐다. A씨는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자친구와 사회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소수자 억압 문제에 (오이를 먹지 못하는 것을) 대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실 이렇게까지 큰 반응이 올 줄은 몰랐죠. 오이를 싫어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걸 저희는 ‘오밍아웃’이라고 하는데요. 이 모임이 알려지면서 당당하게 내 식성을 얘기할 수 있어 해방감을 느꼈다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했다.

살아오면서 오이 때문에 고초를 많이 겪은 건지 궁금해졌다. A씨는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오이를 먹으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며 “냉면, 국수처럼 차가운 면 요리를 정말 좋아하는데 보통 차가운 면 요리에는 오이가 다 들어가지 않나. 어디 가서든 ‘빼주세요’는 눈치보지 않고 했다”고 말했다. 다만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오이 알레르기가 있든 오이 냄새가 있든 오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껴 ‘오자이크(오이+모자이크)’를 해야 하는 이들이 겪는 고충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한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트라우마 치유 장소가 되는 것도 즐겁지만 최근 ‘오싫모’가 주목받으면서 오이를 싫어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변화가 나타나는 게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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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미 오이향이 잔뜩 배인 냉면 국물을 그저 오이만 덜어내는 식으로 빼주는 무심함이나 오이를 빼면 다른 재료 뭐가 있느냐는 완고함에 상처입는다. 그는 “한 냉면 프랜차이즈에서는 메뉴를 주문할 때 오이도 선택사항에 넣는다”며 “쌀국수 집에 가면 숙주나 고수를 따로 주는 것처럼 오이도 선택사항이지 강요하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싫모’ 회원들의 애로사항의 가장 큰 축이었던 김밥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김밥 프랜차이즈 ‘바르다 김선생’에서는 오이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 두 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밥 전문점 ‘바르다 김선생’에서는 오이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이 없는’ 김밥 메뉴 2종을 출시했다. /바르다김선생 공식 페이스북김밥 전문점 ‘바르다 김선생’에서는 오이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이 없는’ 김밥 메뉴 2종을 출시했다. /바르다김선생 공식 페이스북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식당에는 ‘오이를 안 드시는 분! 미리 말씀해주세요’라는 공지가 메뉴판 옆에 붙어 있다. /‘오싫모’ 페이지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식당에는 ‘오이를 안 드시는 분! 미리 말씀해주세요’라는 공지가 메뉴판 옆에 붙어 있다. /‘오싫모’ 페이지


이들이 ‘싫어하는’ 대상은 사실 오이가 아니다. 그는 오이 혐오에서 이 모임이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했다. 그는 “‘싫어하다’는 단어를 선택한 것도 ‘못 먹는다’와 비슷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들이 싫은 것은 ‘오이’도 선택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란다.

얼마 전 ‘오싫모’에 대항하는 모임으로 ‘오이를 좋아하는 모임(오좋모)’ 페이지도 개설됐다. 그는 ‘오좋모’ 회원들과도 충분히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저희가 먹을 뻔한 오이를 먹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잖아요”라며 “서로 강요만 하지 않으면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최근 개설된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좋모)’ 페이지에서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배려해 프로필 사진에 ‘오자이크(오이+모자이크)를 해달라는 요청이 오자 이를 반영해 프로필 사진을 변경했다. /오좋모 페이지최근 개설된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좋모)’ 페이지에서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배려해 프로필 사진에 ‘오자이크(오이+모자이크)를 해달라는 요청이 오자 이를 반영해 프로필 사진을 변경했다. /오좋모 페이지


오싫모는 오이를 싫어하는 이들의 존재를 알리는 데 멈추지 않고 ‘강요하는 문화’에 대한 담론을 펴는 활동을 할 예정이다. A씨는 “오이를 싫어하든 알러지가 있든 먹지 못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음식에 대해서 호불호를 갖는 것도 내 취향인데 그런 취향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든 사회구조가 무엇인지 담론을 펴고 싶다”며 “‘꼰대문화’가 될 수도 있고 ‘미시 파시즘(각자의 개성과 선택권을 무시한 채 동일한 규율, 문화, 가치관에 구성원 전체를 묶는 문화)’로도 볼 수 있는데 앞으로 이유를 더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과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때는 다수가 침묵하고 있다가 소수라도 목소리를 내면 일제히 찬성하고 지지하며 목소리를 내는 일종의 ‘소수 영향(minority influence)’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이들은 채식주의에서 작게 파생된 형태의 신념이나 가치 공동체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오싫모의 등장 이후 버섯, 당근, 가지 등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모임이 생겼다. 심지어 술을 싫어하는 모임은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11만명을 넘어섰다. 이에 대해서 윤 교수는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집단 규범에 순응하는 형태에서 전체와 다른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적극적으로 불러내고 이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A씨는 “샘이 나게도 (술을 싫어하는 모임이) 저희보다 좋아요 수가 더 많지만 저희가 하고 싶은 논의를 더 확실하게 하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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