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4일.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과 임원진은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깊이 떨군 필자의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기업의 뜻을 모아 움직이는 단체임에도 어느 순간부터 초심을 잃었구나 하는 반성. 국민과 회원사에 실망감을 준 것에 대한 후회. 국민경제의 발전을 꿈꿨지만 어느새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져왔다는 회오. 고개를 아무리 숙여도 모자라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전경련은 고심을 거듭해왔다. 환골탈태. 확 바뀌어야 한다. 국민과 기업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 고심의 결과를 3월24일 혁신안에 담아 발표했다.
첫 번째가 정경유착 단절이다.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거나 관여되는 일이 일절 없도록 사회협력회계와 사회본부를 폐지해 정치와 연계될 수 있는 고리인 돈과 조직을 없앴다. 부당한 요청에 따른 협찬과 모금활동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단순히 말뿐인 선언으로 그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갖추고자 했다.
그 구체적인 해법의 하나를 의사결정 등 지배구조 혁신에 담았다. 그간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전경련 사무국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분이 많았다.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경영이사회를 구성하고 대외 협찬 등 중요한 의사결정은 모두 경영이사회를 거칠 계획이다. 특히 경영이사회는 오너경영인이 아닌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구성해 보다 객관적이고 투명한 의사결정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투명성도 강화한다. 모든 공익법인은 공시 의무나 감사 2인을 선임해야 하는 등 투명성 확보를 위한 의무사항들이 있다. 전경련은 임의단체다. 그럼에도 공익법인에 준하는 수준의 투명성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초심을 찾겠다. 정책수립 과정에서 기업의 목소리를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분과별 협의회나 위원회를 다시 설계한다. 회원사가 원하는 것과 국가 경제 발전의 접점을 찾는 고민을 하고 기업·전문가·연구진 등으로 구성된 협의회가 대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경제계 싱크탱크의 역할은 유관 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을 중심으로 강화한다. 그동안 한국경제연구원은 주로 대기업 이슈에 치중해왔다. 이제는 양극화 이슈, 4차 산업혁명 등 국민의 삶에 필요한 주제들로 연구의 외연을 넓혀 한국경제연구원을 명실상부한 싱크탱크로 만들고자 한다.
민간 경제외교 채널을 보다 활성화한다. 전경련에는 수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해외 경제단체 파트너들이 있다. 미국·유럽·일본·중국 등 31개국 경제단체와 경제협력위원회를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다. 민간 경제교류를 넘어 정부의 공식 외교 채널이 할 수 없는 일도 그간 많이 해왔다. 예컨대 한미 재계회의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최초로 제안했고 양국 간 비자면제 프로그램을 제안해 실행에 옮기게 하는 데 기여한 바 있다. 한편 한국 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자문위원회 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해나갈 것이다.
이제 50년간 써온 간판을 바꾼다. 대기업 오너 중심의 단체라는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경제인’이 아닌 ‘기업’을 강조한 ‘한국기업연합회’로 바꿔 단다. 50여년 전 전경련을 만든 기업인들의 맘속에는 나라를 발전시키고 궁핍하기만 한 국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지금과는 경제도 사회도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전경련을 만든 기업인들이나 지금 전경련 회원사의 염원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전경련, 아니 한국기업연합회는 앞으로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면서 냉담해진 국민과 회원사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험난한 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시간이 다소 걸릴지 모르지만 진지하게 대화하고 고민하고 실천하다 보면 꼬인 실타래도 언젠가는 정리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